2010년 동티모르국립대학교(UNTL). ‘리더십의 단계와 성격’을 강의하던 날, 한 학생이 손을 들고 내 논리에 정면으로 맞섰다. 반박은 날카로웠고 눈빛은 형형했다. 설전은 종강 벨이 울려서야 멈췄다.
그날 밤, 누군가 자취방 대문을 두드렸다. 낮의 그 학생이었다. 땀에 젖은 채 숨을 고르는 모습에 항의인가 싶어 긴장했으나, 짐작은 빗나갔다.
“교수님, 수업 시간엔 제 생각을 다 전하지 못했습니다. 왜 그런 반대 의견을 가졌는지 설명드리고, 교수님 견해를 다시 듣고 싶어서 왔습니다.”
우리는 현관 돗자리에 마주 앉아 어둠이 내릴 때까지 대화했다. 권위 앞에서 주눅들지 않고, 끝까지 ‘왜’를 묻는 그 청년. 시간이 흘러 그 순간이 동티모르 민주주의와 만난 날임을 나는 알게 되었다.
■ 세계언론자유지수 아세안 중 1위...숫자가 증명한 야성
그 학생의 당돌함은 우연이 아니었다. 2025년 국경없는기자회(RSF) 세계언론자유지수에서 동티모르는 180개국 중 39위를 기록했다. 아세안국가 중에 차순위는 태국(85위), 말레이시아(88). 한국은 61위였다.
동티모르의 순위는 전년도 20위에서 크게 하락하긴 했음에도 동남아 1위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정치 환경, 법적 보호 장치, 편집의 독립성, 투명성, 언론인 안전이라는 항목으로 평가하는 이 지수에서 동티모르는 유독 강하다.
혹자는 “경제가 덜 발달해 권력형 비리가 적은 것”이라 평한다. 일리 있다. 그러나 더 깊은 이유가 있다. 식민 지배 시절, 말할 자유를 위해 목숨 걸었던 저항의 기억이 이들 정신에 새겨져 있다. 동티모르인은 자유가 주어지는 게 아니라 지켜내는 것임을 몸으로 안다.
1인당 GDP 1,500달러(약 219만 9,750 원). 이 숫자 앞에서 동티모르는 되묻는다. 경제 성장이 민주주의의 필수 전제라고 누가 정했는가? 산업화 후 민주화를 경험한 한국에겐 생경한 질문이다.
■ 멍석 깔고 끝장토론 오래된 민주주의 ‘나헤 비티’
동티모르에는 ‘나헤 비티(Nahe Biti)’라는 전통이 있다. ‘멍석을 펴다’라는 뜻이다. 갈등이 생기면 원로와 당사자들이 돗자리에 둘러앉아 끝장 토론으로 합의를 이끌어낸다. 이 전통의 뿌리는 고대 웨할리(Wehali) 왕국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무력이 아닌 의례적 권위와 상호 존중으로 섬을 아울렀던 왕국이다.
동티모르에서 평화학을 전공한 일본인 연구자를 만난 적이 있다. 나도 평화학을 공부했기에 대화가 편했다. “평화학 전공자로서 이 나라에서 가장 인상적인 게 뭡니까?” 그는 주저 없이 답했다. “당연히 나헤 비티지요.”
1999년 유엔 과도행정기구(UNTAET) 통치 시절, 이 전통이 힘을 발휘했다. 초토화된 국토,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섞인 혼란 속에서 서구식 사법 시스템은 한계에 부딪혔다. 결국 UN은 나헤 비티를 공식 도입했다. 진실화해위원회(CAVR)는 이 방식으로 1,400여 건의 갈등을 봉합했다. 민주주의라는 수입품이 작동한 것은, 그것을 받쳐줄 토착의 뿌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 어머니의 땅에서 핀 성평등...투명한 투표함, 혼탁한 길
웨할리 문명은 모계 사회였다. 땅과 집은 딸에게 상속되고, 남성은 처가로 들어간다. ‘어머니의 땅(Rai Inan)’을 중시하는 이 전통은 현대 정치로 이어졌다. 동티모르 국회의 여성 의원 비율은 35%(IPU, 2024년 기준)로, 필리핀(28%), 베트남(27%), 싱가포르(29%)를 앞선다. 한국은 19.1%로 세계 118위다. 제도가 아닌 문화가 만든 수치다.
빛만 있는 건 아니다. V-Dem 연구소 데이터를 보면, 투표와 개표의 투명성은 세계적 수준이나 선거 자금 항목은 낙제점이다. 인구의 40% 가까이가 빈곤선 아래에 있는 나라에서, 유세 현장의 현금과 물품은 뿌리치기 어려운 유혹이 아닌가. 동티모르는 아직 이런 성장통을 지니고 있다. 투표함은 투명해졌다. 이제 그곳으로 가는 길을 닦을 차례다.
■ 멍석 위의 질문...이제 한국에 묻는다
작은 나라 동티모르가 언론자유 아시아 1위, 여성 의원 비율 동남아 1위, 민주주의 동남아 1위를 기록하며 지역 공동체에 아세안에 합류했다.
한국은 4·19와 5·18, 6월 항쟁으로 민주주의를 쟁취했다. 그러나 경제 성장 이후, 그 기억은 희미해지고 있다. 최근의 정치적 혼란, 언론자유지수 하락, 젠더 갈등 심화. 성취했다고 유지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지금 보고 있다. 민주주의의 근육은 풍요 속에서 느슨해진다. 제도만으로는 부족하다. 그것을 받치는 문화가 필요하다.
15년 전 그 청년처럼, 동티모르는 끝까지 물을 수 있는 언론 자유의 나라다. 아세안 가입으로 한국과 제도적 거리가 더 가까워진 동티모르, 이제 그들의 질문이 한국을 향한다.
글쓴이=최창원 전 동티모르국립대 교수 hopeseller@gmail.com
최창원 프로필
현,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원 아세안센터 연구위원
현, 아시아비전포럼 선임연구원
현, 한국스피치웅변협회 동티모르 지부장
전,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 방문학자
전, 동티모르국립대 교수, 한국학센터장
전, UNDP 아름다운동티모르 만들기 프로젝트 자문관
한글 발전 및 한국어 세계화 공로로 대통령 표창(2025)
『테툼어–한국어 사전』, 『한국어–테툼어 사전』 동티모르 말모이팀 편찬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