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5월, 자카르타의 거리는 불타고 있었다. 아시아 금융위기 속에서 루피아 폭락과 물가 급등이 이어지던 가운데 연료 가격 인상이 불씨가 되어 전국적인 폭동으로 번졌다. 당시 나는 주인도네시아 한국대사관 영사로 근무하며 그 상황을 현장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시내 곳곳에서 시위와 약탈이 이어졌고 교민 사회도 긴장 속에서 상황을 지켜봐야 했다. 연료 가격과 생활 물가가 정치적 불안으로 얼마나 빠르게 연결될 수 있는지 체감한 순간이었다. 최근 중동 긴장으로 국제유가가 급등하는 모습을 보며 자연스럽게 그 기억이 떠오른다. 이란을 둘러싼 중동 긴장이 고조되면서 국제유가는 빠르게 상승했다. 전쟁 이전 배럴당 약 70달러 수준이던 브렌트유 가격은 3월 초 90달러를 넘어선 데 이어 3월 8일 기준 100달러 수준에 도달했다. 불과 몇 주 사이 약 40% 가까이 상승한 셈이다. 시장에서는 전쟁이 장기화될 경우 120~140달러 수준까지 상승할 가능성도 거론되고 있다. 경제 전문가들은 이러한 에너지 충격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보통 세 단계로 설명한다. 첫 번째는 전쟁 직후 나타나는 금융시장 충격 단계, 두 번째는 물가와 성장률 변화가 나타나는 거시경제 조정 단계, 세
권력은 본래 공공의 이익을 위해 위임된 것이지만, 그것이 사적 이익을 위한 도구로 전락할 때 사회는 빠르게 병들어 간다. 특히 행정 권력이 법과 제도를 빌미로 국민을 통제하는 위치에 설 때, 그 힘은 정의의 수단이 아니라 착취의 장치로 변질되기 쉽다. 역사는 이러한 사례를 반복적으로 보여 왔다. 베트남 학자 또안아잉(Toàn Ánh)이 1970년에 펴낸 『부패와 뇌물의 예술』의 머리말에는 다음과 같은 경고가 실려 있다. “부패는 후진 민족들에게 헤아릴 수 없는 해악을 끼치는 가장 음험하고도 치명적인 재앙이다. 중국은 부패로 인해 결국 공산 세력의 손에 나라를 빼앗겼다. 공금을 착복하고 직권을 남용하는 행위가 중국 국민당을 패배하게 했으며, 한국에서도 이승만 정부가 바로 이러한 부패 문제로 인해 흔들리다가 결국 붕괴하고 말았다.” 그는 부패를 단순한 개인의 도덕적 일탈이 아니라, 국가의 존립을 위협하는 구조적 병폐로 보았다. 그리고 이를 설명하기 위해 여러 사례를 제시한다. 그중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지금의 이야기도 아니고 우리나라의 이야기도 아니지만, 읽다 보면 낯설기보다 오히려 익숙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프랑스 식민지 시절에 있었던 일이다. 당시 군수
아따우로 섬 서쪽 해안, 아다라(Adara) 마을. 인구 100여 명의 이 작은 마을에는 ‘동티모르의 해녀’라 불리는 여성 잠수부들이 산다. 현지 방언으로 와와타 토푸(Wawata Topu), '물에 잠수하는 여자들'이라는 뜻이다. 손으로 깎은 나무 고글을 쓰고, 직접 만든 작살을 들고, 치마를 입은 채 바다에 뛰어드는 이 여성들이 가족을 먹여 살린다. 필자는 아다라 해녀와 함께 바다에 들어간 적이 있다. 마스크를 쓰고 얼굴을 담그는 순간, 산호 정원이 눈앞에 펼쳐졌다. 보랏빛, 주황빛, 형광 초록빛 산호 사이로 수백 종의 열대어가 헤엄쳐 다녔다. 세상에 이런 곳이 있었나. 그러나 그 황홀함은 곧 공포로 바뀌었다. 해저 바닥의 높낮이가 극단적이었다. 한 발짝 옆이 낭떠러지였다. 숨이 차서 발을 딛고 서야 할 순간, 내 키보다 훨씬 깊은 곳에 있었다. 바닥이 솟아오른 지점까지 간신히 헤엄쳐 가며, 심장이 쿵쿵거렸다. 이 바다는 아름답지만, 만만하지 않다. 이 바다를 매일 맨몸으로 드나들며 생계를 꾸려가는 와와타 토푸의 대단함을, 조금만 맛보고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산호 정원과 심연이 공존하는 이 바다가, 그녀들의 일터다. 사실 아다라에 도착하기 전, 이
미국의 이란 공습과 중동의 긴장은 한반도에도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워싱턴이 “핵과 장거리 미사일 위협”을 명분으로 군사 행동을 선택하는 장면은 평양에도 하나의 학습 효과를 남겼을 것이다. 체제 생존을 최우선 가치로 두는 정권에게 핵은 협상 카드이자 생존 보험이다. 이런 국제 환경에서 북한이 핵을 포기할 유인은 더욱 줄어든다. 나는 북핵 문제를 30여 년 동안 현장에서 지켜봤다. 그렇다고 스스로를 북핵 전문가라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여러 직책을 거치며 북핵 문제의 굴곡을 가까이에서 경험했다. 1993년 2월 북한이 NPT 탈퇴를 선언했을 당시 나는 외교부 국제기구과 사무관이었다. 북한 발표문을 분석하며 그들이 핵 관련 용어를 놀라울 만큼 정교하게 사용한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이후 대전 원자력연구소를 찾아 연료봉, 사용후 핵연료 처리, 우라늄과 플루토늄, 원자로, 핵분열 등 기본 개념을 다시 공부했다. 훗날 협상 문안을 영어로 정리하고 조율할 때 그 경험은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다. 2004~2005년 베이징 6자회담 때는 공보과장으로 현장을 오갔다. 합의문 한 문장, 단어 하나에 담긴 전략적 함의를 설명하고 기자단과 정부 사이의 소통을 관리했다. 완전한
2002년 가을, 2002 부산 아시안게임(9.29~10.14)이 도시를 뜨겁게 달궜다. 서울이 아닌 지방에서 열린 대형 국제 스포츠 행사였다. 부산은 들썩였고, 대학가도 예외가 아니었다. 부산외국어대학교 동양어대는 교수와 학생 모두가 서포터즈로 나섰다. 나는 자연스럽게 ‘베트남 서포터즈’가 되었고, 미디어센터에서 베트남 기자들을 지원하는 일을 맡았다. 내 역할은 단순했다. 셔틀버스를 놓친 기자를 경기장까지 태워다 주고, 통역을 돕고, 길을 안내하는 일. 그러나 대회가 막바지에 접어들며 베트남 선수단 일정이 줄어들자, 기자들도 하나둘 흩어졌다. 누군가는 부산 명소를 찾았고, 누군가는 조기 귀국을 택했다. 그 무렵, 후이토(HUY THỌ)라는 이름의 기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베트남 유력 일간지 뚜오이째(Tuổi Trẻ) 소속이라 자신을 소개했다. 조용하고 성실한 인상이었다.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그는 잠시 ‘기자’라는 신분을 내려놓고 김해의 한 소금공장에서 하루 노동자로 일했다. 다음은 그가 직접 체험한 내용을 일인칭으로 서술한 기사 일부이다. 원문에는 외국인 기자의 음차 표기 특성상 한국인 인물 이름이 다소 혼재되어 있으나, 당시 현장의 기록을 존중해
부산 해운대 새벽 바다를 보며 뉴스를 켰다. 미국이 2월 28일 이란을 공습했고, 이스라엘도 미사일 공격을 단행했다. 중동의 화염은 다시 세계 경제의 심장을 흔들기 시작했다. 자카르타에서 아세안 외교현장 시절, 중동 위기가 동남아 시장을 얼마나 빠르게 흔드는지 여러 번 목격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번 사태의 핵심은 단순한 군사 충돌이 아니다. 호르무즈 해협이다. 세계 해상 원유의 약 20~30%가 통과하는 이 좁은 바다가 막히거나 불안해지면 유가는 즉각 반응한다. 이미 시장과 경제연구소에서는 배럴당 70달러에서 100달러까지 상승 가능성이 거론된다. 한국과 일본처럼 중동 원유 의존도가 높은 나라뿐 아니라 태국·필리핀·베트남 등 아세안 수입국들도 물가 상승과 환율 불안을 피하기 어렵다. 최근 에너지 기업 주가가 오르는 것도 이런 구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위기가 1973년 오일쇼크 같은 충격으로 이어질지는 아직 미지수다. 미국은 셰일 혁명 이후 원유 생산 능력을 갖췄고, 가격 상승 시 생산 확대 카드가 있다. 글로벌 공급망도 과거보다 유연해졌다. 하지만 중동산 원유 수입의 70~90%에 의존하고 있는 한국과 일본의 경제에도 영향이 있을 것이다. 일본은 원유
딜리의 주동티모르 한국대사관 접견실에는 특별한 타이스(Tais)가 놓여 있다. 화려한 전통 문양 사이로 서툴지만 선명하게 수놓인 한글, "감사합니다.“ 동티모르 역사상 처음으로 한국 대학에 교환학생을 다녀온 동티모르국립대(UNTL) 학생들이, 자신들의 유학길을 내준 한국 대사에게 선물한 것이다. 학생들이 며칠 밤낮을 꼬박 들여야만 완성되는 이 직물에 '감사합니다'라는 한글을 새겨 넣은 모습을 보는 것은 필자를 미소짓게 만들었다. 동티모르 사람들에게 무게감 있는 선물인 타이스에, 한국에서 배운 따뜻한 말을 얹었다. 대사관의 타이스가 ‘소리 없는 감사’라면, 딜리 국회 의사당(Parlamento Nacional) 본회의장의 타이스는 ‘국가’ 자체다. 들어서면 의원들의 좌석보다 먼저 눈에 꽂히는 것이 벽면을 따라 걸린 형형색색의 타이스들이다. 동티모르의 지자체를 상징하는 이 직물들은 저마다 문양과 색상이 다르다. 로스팔로스의 타이스에는 악어와 닭이 이깟(Ikat) 기법으로 정교하게 짜여 있고, 옆에 걸린 오에쿠시의 것은 짙은 주황빛 꽃무늬가 전혀 다른 세계를 펼친다. 글자를 몰라도 옷만 보면 어느 고향 사람인지 알 수 있다던 옛말처럼, 국회 벽면은 동티모르의 모든
세계화는 끝났는가. 미중 경쟁과 공급망 재편의 시대를 바라보며 흔히 던지는 질문이다. 그러나 영국 이코노미스트의 수석이코노미스트였던 닐 시어링(Neil Shearing)이 그의 책 The ‘분열의 시대’(Fractured Age)에서 강조하듯, 지금의 변화는 세계화의 종말이 아니라 형태의 변화다. 세계화는 멈춘 적이 없다. 다만 방향과 구조가 달라질 뿐이다. 세계화의 역사는 생각보다 길다. 기원전 수메르와 인더스 문명 사이의 교역, 한나라 시대의 실크로드, 향신료를 따라 움직인 인도양 네트워크는 모두 초기 세계화였다. 상인과 승려, 병사와 질병이 함께 이동하며 기술과 사상, 종교가 퍼졌다. 동남아는 이 흐름의 중심이었다. 말라카 해협과 자바해, 메콩과 차오프라야 강을 따라 인도·중국·이슬람 문명이 교차하며 앙코르와 보로부두르 같은 혼종 문명을 낳았다. 근대의 세계화는 15세기 말 대항해시대 이후 본격화된다. 유럽과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를 잇는 삼각무역, 마닐라 갈레온 무역,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영국과 프랑스의 동남아 진출은 세계경제를 하나의 체계로 묶었다. 향신료와 은, 노예와 면직물의 이동은 동남아를 다시 세계 교역의 중심으로 만들었다. 현대 세계화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