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서정인의 아세안ABC 7] 원칙과 현실 사이, 아세안 ‘조용한 외교’ 가능한가

팍스아메리카 분열 속 아세안, ‘모든 것에 중립’ 아니라 ‘선택적 원칙’ 필요

 

국제질서는 지금 공위기(interregnum)에 놓여 있다. 팍스아메리카의 균열은 분명해졌지만, 이를 대체할 새로운 질서는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이런 과도기에는 규칙이 느슨해지고 힘의 논리가 전면에 등장한다. 약소국과 중견국이 다수인 아세안에게 이는 가장 불안한 환경이다. 이런 상황에서 아세안은 과연 원칙과 현실을 함께 반영한 ‘조용한 외교’를 계속할 수 있을까.

 

아세안 외교는 오랫동안 비간섭, 합의, 점진성을 핵심 원칙으로 하는 아세안 방식(ASEAN Way)을 중시해 왔다. 요란한 성명이나 공개적 충돌을 피하고, 비공식 접촉과 시간을 통한 해결을 선호했다. 이는 이상주의라기보다 현실주의였다. 체제도, 국력도, 전략적 이해도 다른 국가들이 모여 있는 지역에서 최소한의 안정과 신뢰를 유지하기 위한 생존 전략이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지금이다. 미-중 전략 경쟁이 구조화되고, 국제규범의 구속력은 약화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아세안의 원칙은 점점 ‘신중함’이 아니라 ‘모호함’, ‘조용함’이 아니라 ‘침묵’으로 읽히고 있다. 남중국해, 미얀마 사태 등에서 반복된 무력감은 아세안 방식 자체에 대한 회의를 키운다. 원칙을 지키려다 현실을 외면하는 이상주의로 비칠 위험도 커졌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아세안은 조용한 외교를 버릴 필요는 없다. 다만 그 성격을 바꿔야 한다. 모든 사안에 동일한 원칙을 적용하는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주권과 비간섭이라는 원칙은 유지하되, 무력 사용이나 역내 질서 훼손과 같이 생존과 직결된 사안에서는 보다 분명한 기준을 제시해야 한다. ‘모든 것에 중립’이 아니라 ‘선택적 원칙’이 필요하다.

 

또 하나는 외교의 층위화다. 10개국 만장일치를 전제로 한 외교는 점점 작동하지 않는다. 사안별로 뜻을 같이하는 국가들이 먼저 움직이고, 이를 아세안의 자산으로 흡수하는 유연성이 필요하다. 경제나 사회문화 분야에서부터 ASEAN-X 방식의 의사결정을 취할 수 있다. 올해 초 ISEAS 대담에서 리센룽 싱가포르 선임장관도 이런 유연한 방식의 채책을 검토해야한다고 말한 바 있다. 합의는 목표가 아니라 수단 중 하나여야 한다.

 

조용함도 재정의돼야 한다. 말은 아끼되, 행동은 분명해야 한다. 공동 대응 메커니즘, 규범 설정, 실무 협력과 같은 ‘저소음-고밀도 외교’가 요구된다. 침묵은 더 이상 전략이 될 수 없다.

 

공위기의 시대, 아세안의 선택지는 둘이다. 원칙 뒤에 숨은 조용한 방관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원칙을 현실에 맞게 조정하며 균형을 설계하는 조용한 행위자가 될 것인가. 후자를 선택할 때 아세안의 존재 이유는 여전히 유효하다.

 

글쓴이=서정인 전 아세안대사 jisuh0803@gmail.com

 

 

서정인 전 아세안대사는?

 

외교부 공보과장 및 동남아과장, 남아시아태평양국장, 역임했다. 이후 아세안 대사, 태국 공사참사관에서 최근 2019년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 준비기획단장까지 20여년 이상 동남아 및 아세안 관련 업무를 했다.

 

<한-아세안 외교 30년을 말한다>(2019), <아세안의 시간>(2019) 단행본 공동 편집 및 특별기고를 했으며, 정기 간행물 외교지 기고 및 아시아 경제, 부산일보 고정 칼럼을 비롯해 매경, 한국 등 일간지에 동남아 및 아세안 관련 기고를 했다.

 

고려대 아세안 센터 연구위원, 아세안-동아시아 경제연구소(ERIA) 이사, 아세안안보포럼 전문가 그룹(ARF EEPs) 일원이며 국립외교원 명예교수도 역임했다.

관련기사

포토리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