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하반기에도 ASEAN 정상회의가 의장국 필리핀에서 개최될 예정이다. 한국 대통령도 참석할 것으로 보인다. 아세안 의장국은 매년 초, 그해 의장국으로서 중점적으로 추진할 우선 과제를 제시한다. 의장국의 문제의식과 언어는 한 해 동안 아세안을 바라보는 중요한 기준점이 된다.
지난 2월 6일, 필리핀 외교장관 마리아 테레사 P. 라자로는 싱가포르의 동남아연구소(ISEAS) 강연을 통해 2026년 아세안 의장국으로서의 구상을 공유했다. 전체적인 인상만 보면 새로울 것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 연설은 올 한 해 아세안의 방향을 가늠할 수 있는 하나의 나침반이라는 점에서 차분히 짚어볼 가치가 있다. 이 글에서는 필리핀 외교장관 연설의 핵심을 정리하고, 여기에 담긴 한국 외교에 대한 함의를 덧붙이고자 한다.
2026년 아세안 의장국을 맡는 필리핀은 결코 편안한 시기에 키를 잡지 않는다. 미·중 전략 경쟁의 장기화, 우크라이나와 중동의 전쟁, 글로벌 공급망 재편, 기후 위기와 기술 혁명까지, 오늘의 국제 환경은 불확실성과 예측 불가능성이 일상화된 상태다. 라자로 장관이 현 세계를 ‘3U—격변(Upheaval), 불확실성(Uncertainty), 예측 불가능성(Unpredictability)’으로 규정한 배경도 여기에 있다.
이 같은 인식 위에서 필리핀이 제시한 2026년 아세안 의장국 주제는 “Navigating Our Future, Together(함께 미래를 항해하다)”다. 단독 항해가 아닌 ‘집단항해’라는 표현은 우연이 아니다. 이는 분열과 각자도생의 유혹 속에서도 아세안이 공동체로서 방향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메시지이자, 아세안 중심성(ASEAN Centrality)을 재확인하려는 정치적 선언에 가깝다.
필리핀은 이 주제를 ‘아세안 공동체 비전 2045’라는 장기 로드맵 속에 위치시킨다. 회복력 있고 역동적이며 사람 중심적인 규범 기반 공동체, 그리고 지속 가능하고 포용적인 발전을 이끄는 경제 엔진으로서의 아세안이 그 목표다. 이를 실현하기 위한 전략적 틀로 필리핀은 세 가지 기둥을 제시했다. 평화·안보 앵커(Peace and Security Anchors), 번영 회랑(Prosperity Corridors), 사람 역량 강화(People Empowerment)가 그것이다.
정치·안보 분야에서 필리핀의 접근은 ‘안정의 관리’에 가깝다. 국제법과 규범에 기초한 대화 강화, 우호협력조약(TAC) 50주년 기념, 그리고 아세안 주도 회의체를 통한 협력 증진은 전통적이지만 여전히 핵심적인 과제다. 특히 미얀마 사태와 관련해 필리핀은 5개항 합의(Five-Point Consensus)가 여전히 유일한 공식 틀임을 분명히 하면서, 폭력 중단이 모든 진전의 전제 조건임을 재확인했다. 이는 아세안 특유의 ‘점진적 관여’ 방식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판단을 반영한다.
남중국해 문제 역시 같은 맥락에서 다뤄진다. 필리핀은 아세안–중국 행동규범(COC) 협상을 가속화하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면서, 실무회의를 통해 지리적 범위, 법적 정의, 이행 메커니즘 등 실질적 쟁점을 논의하고 있음을 공개했다. 이는 선언적 합의에서 벗어나 ‘작동하는 규칙’을 만들려는 시도로 평가할 수 있다.
경제 분야에서 눈에 띄는 개념은 번영 회랑(Prosperity Corridors)이다. 무역·투자 연계 강화, 디지털 전환 가속, 중소기업(MSME) 통합, 창조경제와 혁신, 지속 가능하고 포용적인 경제를 하나의 패키지로 묶었다. 특히 아세안 디지털경제 기본협정(DEFA)을 디지털 전환의 핵심 엔진으로 설정한 점은, 향후 아세안 경제 통합의 무게중심이 관세 인하보다 디지털 규범과 제도 정합성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AI, 데이터, 전자상거래를 둘러싼 규범 경쟁의 시대에 아세안이 뒤처지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사회·문화 분야에서 제시된 사람 역량 강화(RISE) 역시 주목할 만하다. 회복력 있는 가족, 포용적 발전, 청년과 혁신, 환경 지속 가능성과 식량 안보는 그동안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던 사회적 기반을 전면에 올려놓는다. 특히 고령화 대응과 ‘실버 이코노미’ 언급은 아세안이 더 이상 젊은 사회에만 머물지 않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대목이다. 성장의 과실이 취약계층과 노년층까지 확산되지 못한다면, 아세안 공동체의 정당성은 약화될 수밖에 없다.
종합해보면, 필리핀이 제시한 2026년 아세안 의장국 구상은 과감한 비약보다는 현실적 관리와 점진적 진화에 방점이 찍혀 있다. 격변의 시대에 방향을 급히 틀기보다, 규범·대화·포용이라는 기존 자산을 다듬어 공동 항해를 지속하겠다는 선택이다. 이는 아세안의 한계이자 동시에 강점이다.
한국 외교에 주는 시사점도 분명하다. 첫째, DEFA와 AI 논의 등 디지털 규범 형성 과정에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둘째, 미얀마와 남중국해처럼 민감한 사안에서는 ‘속도’보다 ‘신뢰 구축’을 중시하는 아세안식 접근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셋째, 고령화·사회 안전망·기후 대응 등 사람 중심 의제는 한국과 아세안이 실질 협력을 확대할 수 있는 유망 분야다.
‘함께 항해하는 미래’라는 필리핀의 메시지는 거창해 보이지만, 그 본질은 단순하다. 불확실한 바다에서 아세안이 흩어지지 않도록, 속도를 늦추더라도 같은 방향을 유지하자는 제안이다. 2026년, 아세안은 다시 한 번 그 특유의 방식으로 생존과 적응을 모색하게 될 것이다.
글쓴이=서정인 전 아세안대사 jisuh0803@gmail.com
서정인 전 아세안대사는?
외교부 공보과장 및 동남아과장, 남아시아태평양국장, 역임했다. 이후 아세안 대사, 태국 공사참사관에서 최근 2019년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 준비기획단장까지 20여년 이상 동남아 및 아세안 관련 업무를 했다.
<한-아세안 외교 30년을 말한다>(2019), <아세안의 시간>(2019) 단행본 공동 편집 및 특별기고를 했으며, 정기 간행물 외교지 기고 및 아시아 경제, 부산일보 고정 칼럼을 비롯해 매경, 한국 등 일간지에 동남아 및 아세안 관련 기고를 했다.
고려대 아세안 센터 연구위원, 아세안-동아시아 경제연구소(ERIA) 이사, 아세안안보포럼 전문가 그룹(ARF EEPs) 일원이며 국립외교원 명예교수도 역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