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화는 끝났는가. 미중 경쟁과 공급망 재편의 시대를 바라보며 흔히 던지는 질문이다. 그러나 영국 이코노미스트의 수석이코노미스트였던 닐 시어링(Neil Shearing)이 그의 책 The ‘분열의 시대’(Fractured Age)에서 강조하듯, 지금의 변화는 세계화의 종말이 아니라 형태의 변화다. 세계화는 멈춘 적이 없다. 다만 방향과 구조가 달라질 뿐이다.
세계화의 역사는 생각보다 길다. 기원전 수메르와 인더스 문명 사이의 교역, 한나라 시대의 실크로드, 향신료를 따라 움직인 인도양 네트워크는 모두 초기 세계화였다. 상인과 승려, 병사와 질병이 함께 이동하며 기술과 사상, 종교가 퍼졌다. 동남아는 이 흐름의 중심이었다. 말라카 해협과 자바해, 메콩과 차오프라야 강을 따라 인도·중국·이슬람 문명이 교차하며 앙코르와 보로부두르 같은 혼종 문명을 낳았다.
근대의 세계화는 15세기 말 대항해시대 이후 본격화된다. 유럽과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를 잇는 삼각무역, 마닐라 갈레온 무역,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영국과 프랑스의 동남아 진출은 세계경제를 하나의 체계로 묶었다. 향신료와 은, 노예와 면직물의 이동은 동남아를 다시 세계 교역의 중심으로 만들었다.
현대 세계화는 지난 150년 동안 세 단계로 발전했다. 산업혁명 이후 1870년부터 1차 세계대전까지의 세계화 1기는 무역과 자본, 이민이 동시에 폭증한 시기였다. 유럽에서 미주로의 대규모 이민이 대표적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브레튼우즈 체제와 함께 시작된 세계화 2기는 국가 주도의 무역과 산업화가 특징이었다.
일본과 한국, 대만이 이 시기에 세계경제로 편입됐다. 1970년대 이후 냉전 종식과 WTO 출범, 중국의 세계시장 진입으로 이어진 세계화 3기는 ‘초세계화’였다. 중국·인도·동남아 등 40억 인구가 글로벌 생산망에 들어오며 서비스 교역과 자본 이동이 폭증했다.
시어링이 강조하는 세계화의 네 가지 특징은 분명하다. 첫째, 모든 시기에서 무역은 증가했다. 둘째, 노동 이동은 세계화 1기에서 가장 컸고 이후에는 공급망과 자본 이동이 중심이 됐다. 셋째, 세계화 3기는 규모와 범위가 압도적으로 확대됐다. 넷째, 세계화의 위기 역시 형태가 달랐다. 1930년대 대공황 때처럼 교역이 붕괴하지는 않았다.
2010년 이후 우리는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다. 미중 전략경쟁, 팬데믹, 우크라이나 전쟁, 기술패권 경쟁이 이어지며 세계화가 후퇴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시어링은 이를 ‘탈세계화’가 아니라 ‘재세계화’로 본다. 첨단기술과 군수·에너지 산업은 미국 블록과 중국 블록으로 나뉘어 블록 내부 공급망이 강화되고, 소비재와 중간재 같은 범용 산업은 여전히 블록 간 교역이 지속된다. 세계화는 끊어진 것이 아니라 균열된 것이다.
이 구조 속에서 동남아의 의미는 더욱 커진다. 역사적으로 동남아는 향신료 세계화의 중심이었고, 냉전기에는 일본·한국 투자로 산업화의 기반을 다졌으며, 초세계화 시대에는 중국 생산망과 글로벌 시장을 잇는 허브가 되었다. 지금의 재세계화 시대에는 ‘차이나 플러스 원’ 전략의 핵심 공간이 되고 있다. 베트남의 전자산업, 인도네시아의 니켈과 배터리, 태국의 자동차 산업은 새로운 공급망 지형을 보여준다.
동남아의 강점은 단순한 생산비용이 아니다. 인도양과 태평양을 잇는 위치권력, 몬순을 따라 형성된 해상 네트워크, 혼종 문명에서 비롯된 유연한 외교가 결합된 결과다. 인도와 중국, 이슬람과 서구 문명을 동시에 수용해온 만달라적 세계관은 오늘날 아세안의 합의 외교와 전략적 균형의 뿌리다.
따라서 세계화의 미래는 단순한 탈동조화나 블록화가 아니다. 기술과 안보 영역에서는 블록 내 통합이 강화되고, 소비재와 서비스에서는 여전히 상호의존이 지속되는 다층적 세계화다. 이는 아미타브 아차리아가 말한 ‘다중 중심 세계’와도 맞닿아 있다. 동남아는 그 교차점에 서 있다.
세계화는 멈추지 않는다. 향신료의 항로에서 반도체 공급망으로, 실크로드에서 디지털 네트워크로 모습만 달라질 뿐이다. 그리고 그 모든 흐름 속에서 동남아는 언제나 세계사의 중심 항로였다. 너무 동남아 중심의 역사관인가.
글쓴이=서정인 전 아세안대사 jisuh0803@gmail.com
서정인 전 아세안대사는?
외교부 공보과장 및 동남아과장, 남아시아태평양국장, 역임했다. 이후 아세안 대사, 태국 공사참사관에서 최근 2019년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 준비기획단장까지 20여년 이상 동남아 및 아세안 관련 업무를 했다.
<한-아세안 외교 30년을 말한다>(2019), <아세안의 시간>(2019) 단행본 공동 편집 및 특별기고를 했으며, 정기 간행물 외교지 기고 및 아시아 경제, 부산일보 고정 칼럼을 비롯해 매경, 한국 등 일간지에 동남아 및 아세안 관련 기고를 했다.
고려대 아세안 센터 연구위원, 아세안-동아시아 경제연구소(ERIA) 이사, 아세안안보포럼 전문가 그룹(ARF EEPs) 일원이며 국립외교원 명예교수도 역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