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동티모르의 살아있는 민주주의 정신이다.” 동티모르에서 “생명연금의 소급 취소를 결정한 규칙은 위헌이 아니다”라는 법원의 판결이 3월 26일나왔다. 라파(rafa) 등 현지 미디어에 따르면 자신타 코레이아 다 코스타 (Jacinta Correia da Costa) 항소법원 주심 판사 등이 서명한 문서에 따르면 “2002년 제1차 국회 입법부가 시작된 이래 생명연금을 만들거나 승인하거나 규제한 모든 법 조항의 최소를 소급 적용해 결정했다”고 밝혔다. 대상은 대통령, 총리, 대법원장, 국회의원 및 정부 구성원고 같은 이전 주권 기관의 연금이 포함되었다. 이 판결문은 “2002년 5월 20일부터 시행된 독립 회복일에 해당하는 법은 연재 및 미래의 연금 지급이 즉시 중단될 것”이라고 결정했다. 한편 계약 배정에 대한 보상을 받지 않기로 한 결정은 평등의 원칙을 위반한다는 점을 고려, 일부만 위헌으로 판단했다. 지난해 9월 동티모르 대학생(EUTL)이 주도해 “의원들에게 월 생명 연금을 보장하라는 법을 재검토하라”며 국회앞에서 3일간 격렬한 항의를 했다. 9월 29일 호세 라모스-호르타 대통령은 “2002년 5월 20일 이후 소급이 적용 결정”이라고 정부에 합
동티모르 체류 초기 필자는 동티모르 정부 인사의 통역할 일이 있었다. 동티모르 정부 인사는 생각지 못한 질문을 불쑥 던졌다. "한국의 기술로 그레이터 선라이즈의 가스를 동티모르 쪽으로 가져올 수 있겠습니까." 그 문장을 통역하면서, 이 나라가 그 가스전에 얼마나 깊이 기대고 있는지를 실감했다. 그레이터 선라이즈는 1974년에 발견됐고 당시 이미 수십 년째 개발이 지연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방 안의 공기는 희망으로 가득했다. 이미 실현된 희망은 바유운단(Bayu-Undan) 가스전이었다. 현지 공무원들은 산유국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꼈다. 그럴 만한 근거도 있었다. 석유기금(Petroleum Fund)만큼은 국제사회에서 인정받는 제도였다. 2019년 전 세계 64개 국부 펀드 투명성·책임성 평가에서 세계 7위에 올랐고,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에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손실을 내지 않은 국부 펀드로 기록됐다. 규모가 아니라 원칙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 원칙은 일찍 흔들렸다. 석유기금법이 정한 지속가능인출수준(ESI)은 기금 총자산의 3%였지만, 2008년 이후 한 번도 지켜지지 않았다. 2009년부터 연평균 인출 비율은 법정 한도의 1.7배인 5
새벽 세 시. 하투 부일리쿠(Hatu Builico) 마을에서 손전등 불빛이 하나둘 켜진다. 순례자들이 정상을 향해 오르기 시작한다. 해발 2,963미터. 티모르섬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다. 노벨평화상 수상자 조제 하무스-호르타(José Ramos-Horta)는 이 산을 두고 “죽은 자들의 영혼이 모여 천국으로 떠나기 전 머무는 신성한 산이며, 위기가 닥치면 돌아가신 지도자들이 평화로 향하는 길을 찾기 위해 모이는 곳”이라 표현했다. 이 성산(聖山)을 오르기 전, 여행자들이 가장 먼저 마주하는 혼란은 바로 이름이다. 어떤 지도에는 ‘라멜라우(Ramelau)’, 어떤 안내서에는 ‘타타마일라우(Tatamailau)’라 적혀 있기 때문이다. 정답부터 말하면 둘 다 맞지만 의미는 다르다. ‘타타마일라우’는 이 지역 원주민 언어인 맘바이어(Mambai)로 ‘모든 이의 할아버지’라는 뜻이다. 이 땅에 뿌리내린 사람들이 수천 년간 불러온 이름으로, 한국인의 백두산과 같은 상징성을 갖는다. 반면 ‘라멜라우’는 이 봉우리가 속한 산맥 전체를 가리키는 지리학적 명칭이다. 독립 이후 동티모르인들은 조상의 언어를 되찾아 ‘포호 타타마일라우(Foho Tatamailau)’를 공식 명
아따우로 섬 서쪽 해안, 아다라(Adara) 마을. 인구 100여 명의 이 작은 마을에는 ‘동티모르의 해녀’라 불리는 여성 잠수부들이 산다. 현지 방언으로 와와타 토푸(Wawata Topu), '물에 잠수하는 여자들'이라는 뜻이다. 손으로 깎은 나무 고글을 쓰고, 직접 만든 작살을 들고, 치마를 입은 채 바다에 뛰어드는 이 여성들이 가족을 먹여 살린다. 필자는 아다라 해녀와 함께 바다에 들어간 적이 있다. 마스크를 쓰고 얼굴을 담그는 순간, 산호 정원이 눈앞에 펼쳐졌다. 보랏빛, 주황빛, 형광 초록빛 산호 사이로 수백 종의 열대어가 헤엄쳐 다녔다. 세상에 이런 곳이 있었나. 그러나 그 황홀함은 곧 공포로 바뀌었다. 해저 바닥의 높낮이가 극단적이었다. 한 발짝 옆이 낭떠러지였다. 숨이 차서 발을 딛고 서야 할 순간, 내 키보다 훨씬 깊은 곳에 있었다. 바닥이 솟아오른 지점까지 간신히 헤엄쳐 가며, 심장이 쿵쿵거렸다. 이 바다는 아름답지만, 만만하지 않다. 이 바다를 매일 맨몸으로 드나들며 생계를 꾸려가는 와와타 토푸의 대단함을, 조금만 맛보고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산호 정원과 심연이 공존하는 이 바다가, 그녀들의 일터다. 사실 아다라에 도착하기 전, 이
딜리의 주동티모르 한국대사관 접견실에는 특별한 타이스(Tais)가 놓여 있다. 화려한 전통 문양 사이로 서툴지만 선명하게 수놓인 한글, "감사합니다.“ 동티모르 역사상 처음으로 한국 대학에 교환학생을 다녀온 동티모르국립대(UNTL) 학생들이, 자신들의 유학길을 내준 한국 대사에게 선물한 것이다. 학생들이 며칠 밤낮을 꼬박 들여야만 완성되는 이 직물에 '감사합니다'라는 한글을 새겨 넣은 모습을 보는 것은 필자를 미소짓게 만들었다. 동티모르 사람들에게 무게감 있는 선물인 타이스에, 한국에서 배운 따뜻한 말을 얹었다. 대사관의 타이스가 ‘소리 없는 감사’라면, 딜리 국회 의사당(Parlamento Nacional) 본회의장의 타이스는 ‘국가’ 자체다. 들어서면 의원들의 좌석보다 먼저 눈에 꽂히는 것이 벽면을 따라 걸린 형형색색의 타이스들이다. 동티모르의 지자체를 상징하는 이 직물들은 저마다 문양과 색상이 다르다. 로스팔로스의 타이스에는 악어와 닭이 이깟(Ikat) 기법으로 정교하게 짜여 있고, 옆에 걸린 오에쿠시의 것은 짙은 주황빛 꽃무늬가 전혀 다른 세계를 펼친다. 글자를 몰라도 옷만 보면 어느 고향 사람인지 알 수 있다던 옛말처럼, 국회 벽면은 동티모르의 모든
남서쪽 끝자락, 국경 도시 수아이(Suai)의 공기는 유난히 묵직했다. 그 덥고 습한 바람을 맞으며 들어선 마을에서 나는 잊을 수 없는 장면과 마주했다. 조상신이 머무는 신성한 집, ‘우마 루릭(Uma Lulik)’ 앞이었다. 뾰족하게 솟은 전통 가옥의 문앞에 으레 악귀를 쫓는 무시무시한 수호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 너무나 익숙한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예수였다. 놀라웠던 건 그 표정이다. 창을 든 전사도, 심판자의 얼굴도 아니었다. 그는 세상 모든 풍파를 다 품어줄 듯 더없이 인자한 미소로 그 토속적인 우마 루릭의 문 앞에 양쪽 기둥에 서 있었다. 이질적이면서도 묘하게 어울리는 그 모습. 그 순간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이들에게 가톨릭은 바티칸에서 건너온 딱딱한 교리만은 분명 아니었다. 척박한 땅과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자신들을 지켜주는 가장 강력하고 따뜻한 ‘루릭(Lulik, 신성한 힘)’ 그 자체였다. 바티칸 시티라는 특수한 도시국가를 제외하고 동티모르는 종교자유가 있는 국가들 중에 사실상 가장 높은 비율의 가톨릭 신앙을 보이고 있다. 2022년 인구 센서스에 따르면 무려 97.6%가 신자다. 딜리(Dili)에도 모스크 돔이 있긴 하다. 하지만 동티
2016년 7월, 동티모르의 수도 딜리는 밤새 잠들지 못했다. 새벽 5시, 찢어질 듯한 오토바이 배기음이 창문을 흔들었다. 폭동인가 싶어 내다본 거리에는 초록과 빨강의 물결이 넘실거렸다. 동티모르 국기가 아니었다. 이 땅을 지배했던 식민 종주국, 포르투갈의 국기였다. 유로 2016 결승전에서 포르투갈이 프랑스를 1-0으로 꺾던 그날, 딜리는 리스본보다 더 뜨겁게 울었다. 이 기이한 풍경의 정점을 찍은 건 다름 아닌 샤나나 구스망(Xanana Gusmão)이었다. 동티모르 독립 투쟁의 상징이자 초대 대통령인 그 국부(國父)가 거리로 나왔다. 양손에는 동티모르 국기와 포르투갈 국기가 하나씩 들려 있었다. 식민 지배에 맞서 17년간 정글을 누빈 게릴라 사령관이, 옛 통치국의 승리에 만세를 부르고 있었다. 이방인의 눈에는 모순 덩어리다. 왜 독립 영웅이 옛 식민 종주국의 깃발을 흔드는가? 필자도 이 장면 앞에서는 잠시 멈칫했다. 표면적 이유는 분명하다. 바로 옆에 붙은 거인, 인도네시아와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것이다. 24년의 불법 점령 기간 동안 전체 인구의 최소 4분의 1을 죽음으로 내몬 인도네시아와 자신들을 구분 짓는 끈이 바로 포르투갈어, 가톨릭, 그
동티모르에서 수업을 마치고 가까운 호텔까지 걸어서 10분 남짓이었다. 적도의 오후 햇살이 비출 때면 그 10분은 만만치 않다. 불과 몇 분을 걸었을 뿐인데 셔츠가 등에 달라붙고, 이마에서 땀이 흐르기 일쑤다. 그래서인지 호텔 로비 카페에서 만나는 파스텔 드 나타(Pastel de Nata)—포르투갈식 에그타르트—는 더욱 강렬했다. 작지만 매혹적인 그 과자를 한 입 베어 물면, 정신이 번쩍 들 만큼 달콤한 커스터드 크림이 혀를 감쌌다. 나는 짧은 꿀맛 같은 간식 시간을 아직 기억한다. 유럽의 남쪽 끝 포르투갈과 아시아의 거인 인도네시아가 이 작은 섬나라의 식탁 위에서 만난다. 포르투갈식 베이커리에서는 달콤한 바닐라와 버터 향이 진동하고, 인도네시아식 식당과 노점상에서는 짭조름한 쇠고기 국물 냄새가 뒤섞인다. 이 기묘한 두 향기의 공존은 두 식민통치국가가 남긴 동티모르인의 삶 속에 역사 그 자체다. ■ 포르투갈 식민지가 남긴 달콤한 유산, '파스텔 드 나타’ 여행자들을 매혹하는 첫 번째 맛은 단연 '파스텔 드 나타', 포르투갈식 에그타르트다. 오랜 식민 지배가 남긴 유산이다. 리스본의 제로니모수 수도원에서 수도사들이 남은 노른자로 빚어낸 이 과자는, 19세기 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