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고전문학의 대표작 ‘춘향전’이 베트남의 민담 속에도 존재한다는 사실은 쉽게 믿기 어려운 이야기다. 그러나 20세기 후반, 베트남 민속학자 응웬동찌가 수집하여 출판한 『베트남 민담집』에 「춘향낭자전」이 나오면서, 이 놀라운 사실이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 ‘베트남판 춘향전’은 단순한 호기심의 대상이 아니라, 한–베 문학 교류의 실체를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다. 한국과 베트남은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지만, 역사적으로는 중국 문화를 매개로 한 ‘동문(同文) 문화권’에 속해 있었다. 한자를 공통의 문자로 사용했고, 유교적 정치 질서와 문학 관념을 공유했다. 또한 두 나라는 외세의 침략과 식민 지배라는 비슷한 경험을 겪으며 근대에 진입했다. 이러한 조건은 문학과 사상이 국경을 넘어 이동할 수 있는 토양이 되었다. 이른바 ‘동문 문화권’은 단순히 한자를 사용했다는 사실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고전 텍스트를 읽고 해석하는 방식, 문학이 사회 현실을 비판하는 역할, 그리고 서사가 윤리적 판단을 담아야 한다는 인식까지 공유했던 문화적 토대를 가리킨다. 이러한 공통의 인식 위에서 한 나라의 이야기와 시가 다른 나라로 옮겨 가는 일은 결코 낯선 일이 아니었
동티모르에서 수업을 마치고 가까운 호텔까지 걸어서 10분 남짓이었다. 적도의 오후 햇살이 비출 때면 그 10분은 만만치 않다. 불과 몇 분을 걸었을 뿐인데 셔츠가 등에 달라붙고, 이마에서 땀이 흐르기 일쑤다. 그래서인지 호텔 로비 카페에서 만나는 파스텔 드 나타(Pastel de Nata)—포르투갈식 에그타르트—는 더욱 강렬했다. 작지만 매혹적인 그 과자를 한 입 베어 물면, 정신이 번쩍 들 만큼 달콤한 커스터드 크림이 혀를 감쌌다. 나는 짧은 꿀맛 같은 간식 시간을 아직 기억한다. 유럽의 남쪽 끝 포르투갈과 아시아의 거인 인도네시아가 이 작은 섬나라의 식탁 위에서 만난다. 포르투갈식 베이커리에서는 달콤한 바닐라와 버터 향이 진동하고, 인도네시아식 식당과 노점상에서는 짭조름한 쇠고기 국물 냄새가 뒤섞인다. 이 기묘한 두 향기의 공존은 두 식민통치국가가 남긴 동티모르인의 삶 속에 역사 그 자체다. ■ 포르투갈 식민지가 남긴 달콤한 유산, '파스텔 드 나타’ 여행자들을 매혹하는 첫 번째 맛은 단연 '파스텔 드 나타', 포르투갈식 에그타르트다. 오랜 식민 지배가 남긴 유산이다. 리스본의 제로니모수 수도원에서 수도사들이 남은 노른자로 빚어낸 이 과자는, 19세기 초
동남아 외교를 오래 지켜본 이들이 자주 쓰는 표현이 있다. “ASEAN의 by-default leadership(방임적 리더십)”은 의도적으로 질서를 설계해 끌고 가는 리더십이 아니라, 강대국이 서로 불편해 주도하지 못하는 공간을 결과적으로 아세안이 메우며 회의를 굴려가는 리더십을 뜻한다. 반대로 EU 등 선진 지역기구가 국제무대에서 보여주는 방식은 by-design leadership—처음부터 규범과 제도를 설계하고, 기준을 제시하며, 따르지 않으면 비용이 따르는 리더십이다. 이 두 방식은 겉으로 비슷해 보이지만, 작동 원리는 완전히 다르다. ASEAN의 리더십은 ‘의제 설정’이 아니라 ‘판 유지’에 가깝다. 아세안안보포럼(ARF), 아세안+3(APT), 동아시아정상회의(EAS), 확대아세안국방장관회의(ADMM-Plus)같은 협의체에서 아세안의 목표는 늘 같았다. 누구도 불편해서 회의장을 떠나지 않게 하는 것. 그래서 성명은 모호하고, 표현은 절제되어 있으며, 합의는 최소공약수에 머문다. 그 대신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인도, 호주가 같은 테이블에 앉는 구조는 유지된다. ‘아세안중심성(ASEAN Centrality)’는 권위가 아니라, 플랫폼 통제력
동티모르 최고봉 라멜라우산(2,963m). 내가 처음 이 산에 오를 때 길잡이를 맡은 현지인이 산 입구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잠시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을 모아 조용히 기도를 올렸다. 왜 여기서 기도를 하느냐고 묻자 그가 답했다. "여기서부터는 신성한 곳(Lulik)입니다. 신성한 땅에 들어가기 전에 예를 갖추는 겁니다.“ 그제야 주변이 다르게 보였다. 등산로 입구에 세워진 나무 기둥, 그 위에 묶인 야자잎과 붉은 천. 관광객 눈에는 이색적인 장식품이었을 것이 필자에게는 보이지 않는 경계선으로 다가왔다. 조상의 영이 지켜보는 영역. 신성하다는 뜻 그래서 금지의 뜻을 함께 갖는 루릭의 대표 상징이 ‘타라 반두(Tara Bandu)’다. 테툼어로 ‘타라(Tara)’는 ‘매달다’, ‘반두(Bandu)’는 ‘금지’를 뜻한다. 금지의 약속을 나무에 걸어 놓고 특정 활동을 하지 않기로 금기하는 관습법이다. 성스럽다는 것 ‘루릭’이란 무엇인가. 동티모르에 살면서 오랫동안 이 질문을 품고 살았다. 누군가 루릭이라 이야기를 내게 묻곤 하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신성한 것이라서 금기시 되는 것 같다’는 밋밋한 답을 했다. 그러던 중 동티모르의 대표 인류학자 조시 트
한국 사회에서 베트남은 더 이상 낯선 나라가 아니다. 수십만 명의 결혼이주민, 노동자, 유학생이 이미 한국 사회의 일부가 되었다. 베트남은 주요 교역국이자 전략적 협력 파트너로 자리 잡았다. 그런데도 “베트남을 안다”라는 우리의 인식은 여전히 어딘가 불안정해 보인다. 문제는 무지 그 자체라기보다, 제한된 지식과 체험이 어느새 ‘이해’라는 이름으로 굳어질 때 발생한다. 최근 베트남의 사회-문화를 소개한다는 일부 서적과 교육 자료를 살펴보면, 단순한 사실 착오를 넘어 인식의 틀 자체에서 비롯된 문제들이 반복적으로 발견된다. 이는 개별 저자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한국 사회에서 출판물과 교육 자료를 통해 재생산되는 베트남 인식이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여기서는 이러한 문제를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 제도와 헌법을 ‘부분 인용’으로 이해하는 방식 ― 국가를 가장 쉽게 단순화하는 방법 자주 나타나는 문제 중 하나는 베트남의 정치-법 제도를 일부 조항만 인용해 국가의 성격을 단정하는 서술 방식이다. 예를 들어 베트남 헌법을 한국 헌법과 비교하면서, 베트남에는 ‘국민주권’ 개념이 없고 영토 관련 조항만 강조되어 있다고 설명하는 경
2015년 아세안 공동체가 출범한 지 1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많은 국민에게는 ‘먼 이야기’다. 역내 무역과 투자는 늘었고, 정상과 외교장관 회의는 정례화됐지만, 일상에서 “아세안 덕분에 삶이 달라졌다”고 말하는 시민은 많지 않다. 아세안이 하나의 공동체라면, 왜 ‘우리(We- feeling)’라는 감각은 이렇게 약할까. 아세안 공동체는 세 개의 축으로 추진돼 왔다. 경제공동체(AEC), 정치안보공동체(APSC), 사회문화공동체(ASCC)다. 성과의 속도와 체감도는 이 순서와 거의 일치한다. AEC는 다국적 기업과 글로벌 가치사슬을 중심으로 가장 빠르게 진전됐다. 역내 교역과 외국인 투자는 확대됐고, 아세안은 ‘하나의 생산기지’로 기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혜택은 대체로 기업과 투자자에게 먼저 돌아갔고, 일반 국민의 체감은 제한적이었다. 정치안보공동체는 엘리트 중심의 영역이다. 분쟁을 관리하는 대화와 규범의 장으로서 아세안의 역할은 여전히 유효하지만, 이는 외교관과 안보 전문가의 언어에 가깝다. 합의와 비간섭의 원칙은 안정에는 기여했지만, 국민에게 ‘공동체의 실감’을 주기에는 거리감이 크다. 가장 늦게, 그리고 가장 더디게 움직여 온 축이 사회문화공동체
요즘 금값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치솟고 있다. 그래서 금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한국 사회에서 ‘금모으기’는 흔히 1997년 외환위기 국면에서의 국민적 연대-가정의 금반지와 목걸이를 내놓아 국가 부채를 갚겠다는 집단적 결단-로 기억된다. 위기는 개인의 삶을 옥죄었지만, 그 위기를 돌파하는 방식은 공동체적이었다. 그러나 이 서사는 한국만의 독점적 경험은 아니다. 베트남은 독립의 문턱에서 이미 ‘금모으기’를 국가 건설의 실천으로 제도화했다. 1945년 가을, 독립 직후의 베트남이 선택한 길은 화폐 정책이나 외채가 아니라, 국민의 신뢰와 자발적 기여를 동력으로 삼는 ‘황금주간(Tuần lễ vàng)’이었다. ■ 보응웬잡 장군 칙령 '황금주간' 공포...독립 직후의 절박함과 선택 1945년 9월, 베트남은 독립을 선언했지만, 국가는 아직 ‘형태’를 갖추지 못했다. 식량난이 심각했고, 북부에는 외국군이 주둔해 있었으며, 무장과 재정은 취약했다. 이때 임시 정부는 구호와 재정의 동시 해법을 모색했다. 하노이 오페라하우스에서 기아 구제 운동을 발족하고, 남부에서 쌀을 북부로 수송하는 조치가 병행되었다. 동시에 정부는 국가 독립을 위한 기금을 제도적으로 마련한다. 19
동티모르국립대학교(UNTL)의 교정은 흡사 바벨탑과 같았다. 나이 든 교수들은 포르투갈어로, 젊은 교수들은 테툼어로 강의했다. 학생들끼리는 저마다 출신 고향의 언어로 수다를 떨었다. 쉬는 시간에 그들 옆에 서서 이야기를 엿들은 적이 있다. 머리가 멍했다. 테툼어에서 단어는 ‘리아푸안(liafuan)’이다. 목소리(lia)에서 맺힌 열매(fuan)라는 뜻이다. 동티모르인들은 말이란 목소리가 익어 맺힌 열매, 공동체를 먹여 살리는 자양분으로 이해했다. 그 열매들을 모아 체계화한 것이 사전이다. 1889년부터 오늘까지, 135년에 걸친 테툼어 사전 편찬의 역사는 곧 동티모르 정체성의 역사다. 최초의 테툼어 이중언어 사전은 포르투갈 선교사 실바 신부가 마카오에서 출간한 『포르투갈어-테툼어 사전』(1889)이다. 1877년 티모르에 첫발을 디딘 후 12년 만의 쾌거였다. 이후 라파엘 다스 도레스가 『테툼어-포르투갈어 사전』(1907)을 리스본에서 출간했다. 식민 통치와 선교를 위한 도구였지만, 역설적으로 테툼어가 문자로 기록된 최초의 순간이었다. 1975년 인도네시아 침공 후 상황이 달라졌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강제병합 1년 만에 『인도네시아어-테툼어 사전』(19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