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금값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치솟고 있다. 그래서 금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한국 사회에서 ‘금모으기’는 흔히 1997년 외환위기 국면에서의 국민적 연대-가정의 금반지와 목걸이를 내놓아 국가 부채를 갚겠다는 집단적 결단-로 기억된다. 위기는 개인의 삶을 옥죄었지만, 그 위기를 돌파하는 방식은 공동체적이었다. 그러나 이 서사는 한국만의 독점적 경험은 아니다. 베트남은 독립의 문턱에서 이미 ‘금모으기’를 국가 건설의 실천으로 제도화했다. 1945년 가을, 독립 직후의 베트남이 선택한 길은 화폐 정책이나 외채가 아니라, 국민의 신뢰와 자발적 기여를 동력으로 삼는 ‘황금주간(Tuần lễ vàng)’이었다. ■ 보응웬잡 장군 칙령 '황금주간' 공포...독립 직후의 절박함과 선택 1945년 9월, 베트남은 독립을 선언했지만, 국가는 아직 ‘형태’를 갖추지 못했다. 식량난이 심각했고, 북부에는 외국군이 주둔해 있었으며, 무장과 재정은 취약했다. 이때 임시 정부는 구호와 재정의 동시 해법을 모색했다. 하노이 오페라하우스에서 기아 구제 운동을 발족하고, 남부에서 쌀을 북부로 수송하는 조치가 병행되었다. 동시에 정부는 국가 독립을 위한 기금을 제도적으로 마련한다. 19
호찌민시 1구 응웬주 거리. 오늘도 이곳, 대한민국 총영사관에는 비자와 민원, 기업 상담을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드나든다. 대부분의 방문객은 이 건물이 베트남과 한국을 잇는 공식 외교 공간이라는 사실만을 인식한다. 그러나 이 건물의 과거를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면, 전혀 다른 풍경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곳은 한때 베트남 마지막 황후, 남프엉 황후의 가족이 살던 집이었다. ■ 한–베 관계는 한 채의 집에서 시작되었다 『신문 사료를 통한 신시대 국모, 남프엉 황후』라는 책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레티빙 여사는 응웬흐우하오(남프엉 황후의 아버지)와 혼인한 이후, 부부는 주로 사이공 응웬주 거리의 저택에서 생활하였다. 이 저택은 훗날 대한민국 외교 공관(현 주호찌민시 대한민국 총영사관) 건물로 사용된 곳이다.” (Lương Hoài Trọng Tính, 2023, p.17) 남프엉 황후가 되기 전, 그녀의 이름은 잔(Jean) 마리엣 응웬티란이었다. 그녀는 황궁이 아니라, 사이공의 한 저택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 집이 바로 오늘날 한국 외교관들이 근무하고 있는 응웬주 거리의 건물이다. 이 집은 황실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당시 사이공 상류 사회의 중심부에 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