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아카데미 영화음악상을 수상한 작곡가 죤 윌리암스의 메인 테마와 해초들 사이를 유유히 스쳐가는 죠스의 시선 쇼트로 시작된다. 이어 한 무리의 청춘남녀들이 모닥불을 피워놓고 파티를 하고 있는, 낭만과 사랑이 출렁이는 해변으로 전환된다. 술에 취한 젊은 여자가 옷을 모두 벗어 던지며 잔잔한 바닷속으로 헤엄쳐 들어간다. 하늘 저 멀리 석양이 그림처럼 지고 있고 모든 것이 순조롭다. 갑자기 그 낮고 느리고 단조로운 음조의 죠스 메인 테마가 들리기 시작하고 헤엄치던 여자는 수면 아래로 끌려들어간다. 여자의 간헐적 비명에 섞이는 메인 테마는 점점 더 빨라지고 날카로워진다. 그리고 시퍼런 바닷물에 붉은 피가 퍼지면 메인 테마도 사라지고 바다엔 적막만 흐른다. 공포영화에선 젊고 아름다운 누군가가 악당에 의해서 비참하게 살해당해야만 막이 오르는 상투적인 방법을 고수한다. 왜냐하면 그 안타까운 죽음에 분노한 관객들은 악당을 물리칠 주인공을 응원하기 시작하고 이야기에 더 깊게 몰입하기 때문이다. 이제 바다를 떠올리기만 해도 자동적으로 흉폭한 죠스가 떠오르게 된 관객들은 바다로 들어가길 꺼리며 백사장에서만 머무는 화면 속의 피서객들을 불안한 마음으로 바라본다. 그런데 긴장이
뉴 저먼 시네마의 3대 기수 중 하나였던 빔 벤더스는 78세의 거장이 되어 자신이 깨달은 삶의 지혜를 청소노동자이자 수행자이자 예술가인 주인공 히라야마의 삶을 통해서 잔잔하게 보여준다. 줄거리는 도쿄 시부야 공중화장실 청소를 하며 홀로 살고 있는 히라야마의 일상을 따라 흘러간다. 매일 평탄하게 반복되는 히라야마의 삶은 주변인물들의 삶에 중첩되면서 미세한 영향을 받게 되고 전혀 예상치 못했던 사건들과 마주치게 된다. 그리고 그는 그 사건들을 묵묵하게 관조하면서 깨달음과 기쁨을 얻는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나타난 조카딸과의 짧은 만남을 통해서 자신 안에 부성애가 잠재되었다는 사실과 더불어 악연이 되어버린 아버지와의 관계를 되새기며 잠시 출렁이지만 다시 마음의 평화를 되찾아 간다는 내용이다. 수행자 히라야마가 새벽에 잠에서 깨어나 출근 직전에 자판기 캔커피를 마시는 순간까지의 행위는 규칙과 순서에 따라 차를 우리고 마시는 일본의 다도를 떠올리게 한다. 이는 자만과 아집 그리고 욕망과 희로애락의 감정에 지배되지 않으려 수행하는 히라야마의 삶을 은유한다. 예술가 히라야마는 오래된 필름카메라를 이용해서 자신만의 방식대로 사진 찍는 행위를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사진찍기
파스빈더가 각본을 쓰고 연출을 한 이 영화는 1974년 서독에서 제작되었다. 1960년대 말 시작된 뉴 저먼 시네마의 기수 중 하나였던 파스빈더는, 이 영화를 통해서 1972년 벌어진 뮌헨학살 이후의 독일과 나치시대의 독일을 오버랩하면서 인종혐오주의를 정면으로 비난한다. 또한 파스빈더는 어쩌면 상투적일 수도 있는 멜로드라마, 즉 통속극의 형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내지만, 홀로 자신의 내면을 마주하거나 눈 앞의 상대를 침묵 속에서 응시하는 인물들의 모습을 독특한 카메라의 시선과 움직임을 통해서, 소극장에서 연극을 볼 때 혹은 갤러리에서 사진을 바라볼 때 발생하는 감흥을 은밀하게 선사한다. 20년 전에 남편과 사별한 후 청소노동자로 홀로 외롭게 살아가는 엠미는 어느 날 밤, 퇴근길에 비를 피해 우연히 들린 바에서 모로코 출신의 이주 노동자인 알리를 만난다. 늙고 초라한 엠미를 놀려먹을 의도를 갖은 심술궂은 여자종업원은 알리에게 엠미와 춤을 추어보라며 부추킨다. 하지만 알리는 자신과 같이 불안에 의해서 영혼이 잠식되어 가고 있는 모습을 엠미에게서 발견한다. 그리고 둘은 다정한 기운이 흐르는 춤을 춘다. 알리는 자신을 낮에는 개처럼 다루고 밤에는 성적대상으로만 취급하는
1950년대에 접어든 할리우드는 영화의 예술성을 간과하는 대신, 돈맛을 본 거대한 자본 세력에 의해서 성냥공장이 되어간다. 같은 기능과 같은 모습의 물건을 만들어내는 공장. 거대 자본 세력들은 티켓 파워는 있지만 매너리즘에 빠져있는 스타급 배우 위주의 캐스팅과 천편일률적인 서술구조를 반복하는 장르영화들로 은막을 채우기에 바빴다. 동시에 지배계급이 원하는 전통적인 관습들과 상업적 유행들을 은근슬쩍 대중들의 무의식에 심어놓는 기능도 충실하게 수행했다. 이런 생태계에서 배우로 살아가던 존 카사베츠는 반체제적이고 전위적인 ‘그림자들’ (원제 Shadows. 1959년 제작) 로 미국영화역사상 최초의 독립영화를 만든 위대한 업적을 남긴다. 고인 물이 되어가던 생태계에 새 물결을 대준 것이다. 그리고 12년 후, 카사베츠는 1930년대의 대공황시절에 탄생했던 스크루볼 코미디의 장르적 구조를 적극적으로 차용해서 오늘 소개할 영화를 만든다. 그는 이 영화에 필름 누아르, 로맨틱 코미디, 뮤지컬, 웨스턴, 로맨스 드라마 등 여러 장르들을 자신만의 해석으로 비틀고 녹여서 인물들의 내면을 성공적으로 표현한다. 사운드 오브 뮤직이 맑고 밝은 날 흐르는 경쾌한 시냇물의 리듬이고,
1954년 이탈리아에서 제작된 로드무비이자 가슴 아픈 사랑이야기다. 나는 이 영화를 중학생이었을 때, 그리고 이십 대 초반에 감상했다. 이 칼럼을 쓰기 위해서 다시 보면서도 눈물을 흘린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의 둘째 딸로서 굶주린 어린 동생들을 위해 희생의 길을 선택한 젤소미나는 자기 자신을 포함한 세상의 모든 것을 향해 분노를 품고 있는 떠돌이 차력사 잠빠노에게 단돈 몇 푼에 팔려간다. 영화 속의 두 주인공인 젤소미나와 잠빠노의 관계를 무학대사와 이성계가 나눴던 돼지와 부처에 비유해보자. 순수한 영혼의 젤소미나는 잠빠노를 모성과 연민으로 품어주지만 동물적 본능만 남은 잠빠노는 당근과 채찍질로 젤소미나를 이용하고 학대할 뿐이다. 두 인물의 굴곡진 여정은 시간을 따라 변화무쌍하게 펼쳐진다. 길 위에서 조우한 서커스단의 어릿광대이자 공중곡예사인 마또는 젤소미나와 잠빠노의 여정에 파란을 일으키고 그 여파로 인해서 젤소미나는 실성을 한다. 매서운 겨울의 황량한 산길 위, 더 이상 젤소미나가 사용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잠빠노는 그녀를 고향으로 데려다 주려 한다. 하지만 그녀는 “당신이 나없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어요?” 라고 되물으면서 거룩하고 성스런 사랑만을 보여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이키루 '산다는 것'은 레프 톨스토이의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 원작이다. 1952년에 각색, 제작된 이 영화는 산더미 같은 서류더미에 파묻혀 있는 주인공 와다나베씨의 등장으로 시작한다. 이 때 전지적 시점의 내레이션은 “그는 살아있지만 죽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라고 조롱한다. 시청의 민원을 담당하는 시민과 과장인 초로의 와다나베씨는 비록 복지부동하였지만 30년 근속이란 대기록을 눈 앞에 두고 위암말기란 청천에 벽력같은 사실을 알게 된다. 어두침침하고 냉기만 도는 집으로 돌아간 그는 퇴근 전인 아들내외의 방에서 작은 전등 불 하나 밝히지 않은 채, 오랜 세월동안 아무도 돌보지 않은 무덤 앞의 초라한 비석 마냥 쪼그려 앉아 아들을 기다린다. 집으로 돌아온 아들내외는 와다나베씨가 자신들의 방에 있단 사실을 모른 채, 와다나베씨가 모아놓은 돈과 곧 다가오는 은퇴 후 받을 연금을 사용해서 단 둘만의 새집으로 이사 갈 궁리를 한다. 더 나아가 와다나베씨를 늙은 구두쇠라며 경멸하다가 전등불을 켜고 나서야 당혹해한다. 허나 그것도 잠시, 자신들의 사생활이 침해 받았다며 오히려 와다나베씨를 타박한다. 창창했던 젊은 시절에 아내와 사별 후,
1969년 10월 하순, 영국의 배우 겸 가수인 줄리 앤드루스가 주연을 맡은 사운드 오브 뮤직(The Sound of Music )이 퇴계로에 있는 대한극장에서 개봉됐다. 영화도 문학과 마찬가지로 사상과 감정을 상상의 힘으로 표현하는 매체라고 여겼던 어머니는 누나와 형들과 나를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대한극장으로 데리고 갔다. 요즘의 멀티플렉스 극장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초대형 스크린을 가리고 있던 붉은 융단 커튼이 스르르르 열리면서 암흑의 공간은 빛으로 채워졌고 미세한 진동이 나의 마음 속에서 꿈틀거렸던 기억이 난다. 55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한 떨림으로 남아 있는 이 진동이야말로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참된 맛 중의 하나가 아닌가 싶다. 영화가 시작되면 창공에 떠있는 구름들이 서서히 흩어지면서 흰 눈을 덮고 있는 장대한 알프스 산맥이 동공을 가득 채우며 사방에 펼쳐지고 차갑고 날카로운 바람소리가 들려온다. 신의 시선처럼 구름보다 더 높은 곳에 있던 카메라가 서서히 하강하면서 하늘보다 더 파란 호수를 끼고 있는 마을과 가까워지면, 바람소리는 사라지고 산새들의 평화로운 합창과 엄마의 숨소리 같은 아늑한 음악의 선율이 귀를 통해 작은 마음을 채워주기 시작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