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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나]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이키루'..."인생은 찰나"

레프 톨스토이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 원작...생일축하 노래가 백미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이키루 '산다는 것'은 레프 톨스토이의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 원작이다. 1952년에 각색, 제작된 이 영화는 산더미 같은 서류더미에 파묻혀 있는 주인공 와다나베씨의 등장으로 시작한다. 이 때 전지적 시점의 내레이션은 “그는 살아있지만 죽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라고 조롱한다.

 

 

시청의 민원을 담당하는 시민과 과장인 초로의 와다나베씨는 비록 복지부동하였지만 30년 근속이란 대기록을 눈 앞에 두고 위암말기란 청천에 벽력같은 사실을 알게 된다. 어두침침하고 냉기만 도는 집으로 돌아간 그는 퇴근 전인 아들내외의 방에서 작은 전등 불 하나 밝히지 않은 채, 오랜 세월동안 아무도 돌보지 않은 무덤 앞의 초라한 비석 마냥 쪼그려 앉아 아들을 기다린다.

 

집으로 돌아온 아들내외는 와다나베씨가 자신들의 방에 있단 사실을 모른 채, 와다나베씨가 모아놓은 돈과 곧 다가오는 은퇴 후 받을 연금을 사용해서 단 둘만의 새집으로 이사 갈 궁리를 한다. 더 나아가 와다나베씨를 늙은 구두쇠라며 경멸하다가 전등불을 켜고 나서야 당혹해한다. 허나 그것도 잠시, 자신들의 사생활이 침해 받았다며 오히려 와다나베씨를 타박한다.

 

창창했던 젊은 시절에 아내와 사별 후, 삶을 만끽하기 보단 외동아들에게만 헌신했던 자신의 삶에 무상감만 느끼게 된 와다나베씨는 선술집에서 우연히 만난 메피스토를 연상케하는 낭만적인 소설가에게 막막하기만 한 자신의 상황을 고백한다.

 

 

삶이란 자고로 즐겨야 한다는 신조를 갖고 있는 소설가의 안내로 환락가를 떠돌며 술과 여자들에게 흥청망청 돈을 뿌리면서 욕망의 세계에 빠져보지만 육체는 이미 늙어버렸단 가혹한 사실만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한껏 들떠 있는 취객들과 젊은 육체를 뽐내는 여급들이 붐비는 어떤 피아노 바에서 슬픈 곡조의 오래된 유행가를 무거운 관처럼 미동도 없이 앉아서 부른다.

 

인생은 찰나이니 빨리 사랑에 빠져요 아가씨야

너의 입술이 아직 붉게 빛날 때 너의 피가 뜨거울 때 말이오

내일이란 없고 인생은 짧으니 사랑에 빠져요 아가씨야

검은 머리가 옅어지기 전에 마음의 불꽃이 타고 있을 때 말이오

오늘은 다시 오지 않아요

 

 

빠른 걸음으로 점점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무상감 그리고 염세의 늪으로 빠져들던 그는, 관료주의의 타성에 젖어든 채 매일매일 반복되는 일을 하며 살아가기보단 남들의 시선에 하찮아 보이는 일이라고 해도 진정으로 가치를 느끼는 일을 하며 살아가겠다는 새내기 부하 여직원의 삶을 통해서, 자신의 청춘을 다 바쳤던 30년 간의 공무원생활이 아무런 가치도 없이 그저 하루하루 시간만 때웠던 것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는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을 진정으로 가치 있는 그 무엇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마음 속 깊게 다짐하며 부하 여직원을 남겨둔 채 커피숍을 황급하게 빠져나간다.

 

와다나베씨의 삶에서 위대한 전환점이 되는 그 순간, 커피숍에 있던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생일을 맞이한 그들의 친구에게 생일축하 노래를 불러주는데, 나는 이 장면이 영화의 백미라고 생각한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와다나베씨는 죽은 것과 다름없다’는 내레이션의 조롱을 기억하는가? 즉, 그 젊은이들이 친구에게 불러주는 탄생의 축가는 와다나베씨의 부활을 의미하는 감독으로부터의 찬가인 것이다.

 

새롭게 태어난 와다나베씨는 과거의 그처럼 복지부동하며 공동체의 발전엔 관심이 없는 동료공무원들과 자신들의 잇속과 선거에만 관심이 있는 고위공무원들과 정치인들 그리고 오로지 돈에만 눈이 먼 사업가들이 고용한 야쿠자들의 협박과 방해를 이겨내고 오랜 세월 동안 장마철만 되면 아수라장이 되는 방치된 하천변에 그 지역의 빈민가 아이들을 위한 자그마한 공원을 건립하는 데 혼신의 힘을 쏟는다.

 

소복같이 하얀 눈이 내리는 겨울이 다시 찾아오고 마침내 그 공원은 건립된다. 그리고 와다나베씨는 그 공원의 그네에 걸터앉아 생을 마감하게 된다. 죽음을 코 앞에 둔 그 마지막 순간에 그는 앞서 피아노 바에서 불렀던 유행가를 다시 부르는데 그 두 장면엔 아주 큰 차이가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표정에서 드러나는 그의 마음인데, 피아노 바에선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면 공원에선 환희의 미소를 지었다는 것이다. 자, 이제 독자들과 나 자신에게 묻는다. 남은 삶을 어떻게 사시겠는가?

 

 

 

 

 

 글쓴이 = 송예섭 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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