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양수의 Xin chào
[배양수의 Xin chào 6] 맥심 레스토랑의 낯선 환대와 ‘아리랑’
1988년 10월 19일 저녁, 우리 일행은 사이공 시내에서도 가장 상징적인 거리인 동커이 거리로 향했다. 전쟁의 흔적과 식민지 시대의 건축 그리고 막 열리기 시작한 개방의 기운이 뒤섞여 있던 그 거리 끝에 ‘맥심(Maxim)’이라 불리던 레스토랑이 있었다. 지금의 호찌민시 1군을 떠올리면 화려한 도시 이미지가 먼저 연상되지만, 당시만 해도 동커이는 아직 과거와 현재가 조심스럽게 겹치는 공간이었다. 그날 우리는 송용등(호주 교포, 로바나 대표) 씨를 따라 맥심으로 들어섰다. 그는 익숙한 걸음으로 앞장섰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 뒤를 따랐다. 그런데 입장하자마자 예상치 못한 장면이 펼쳐졌다. 무대 위에서 연주를 이끌던 밴드 마스터가 송용등 씨를 알아보더니, 지휘를 멈추고는 객석을 향해 몸을 굽혀 정중하게 인사를 한 것이다. 그것은 의례적인 서비스 차원의 인사가 아니었다. 분명히 ‘아는 사람’을 향한, 그리고 존중이 담긴 반응이었다. 이윽고 연주가 다시 시작되었다. 첫 곡은 ‘아리랑’이었다. 이국의 밤, 베트남의 심장부에서 울려 퍼진 아리랑의 선율은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이어서 당시 한국에서 유행하던 가요들이 연주되었다. 조용필의 노래가 흘러나왔고, 주현미의 곡들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우리가 자리를 뜰 때까지 무대에서는 한국 노래만이 연주되었다. 신기했다. 지금 한국에서 유행하는 노래가 베트남에서 연주되다니. 송용등 씨가 악보를 가져다준 것이었다. 첫 베트남 방문이었던 나는 적잖이 놀랐다. 국교 정상화 이전, 한국이라는 존재가 아직 공식적으로 자리잡지 못했던 시기에 이런 장면을 마주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날 밤의 기억은 지금 선명하다. 음악보다 더 강하게 남은 것은, 그 음악을 가능하게 만든 한 사람의 존재였다. ■ 마스터가 꾸벅 인사한 송용등, ‘월남통’이라 불린 사람 송용등 씨는 단순한 동행자가 아니었다. 그는 이미 그 무렵 베트남 사회 곳곳에 깊은 인연을 쌓아온 인물이었다. 1975년 이전부터 베트남에 머물며 베트남 여인과 결혼하여 사업을 하고 있었다. 베트남 통일을 전후해 그는 호주로 이주했고, 그곳에 정착했다. 그리고 1982년부터 베트남 수산물 교역을 하다가, 도이머이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베트남 사업을 키웠다. 당시 베트남은 판매자 시장이었고, 판매자는 구세주 같은 사람이었다. 왜? 그 이유는 단순했다. 당시에는 거의 아무도 베트남에 물건을 팔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물건을 공급할 뿐만 아니라 베트남 수산물을 수입해 가니, 그야말로 구세주 같은 사람이었다. 맥심 레스토랑의 에피소드는 당시 그의 위상을 얘기한다. 1989년부터 한국 언론은 그를 ‘월남통’이라 부르며 집중 조명하기 시작했다. 매일경제는 그를 한국 기업의 베트남 진출에 있어 “교량” 역을 맡은 인물로 소개하며, 그의 사업 경력과 현지 네트워크를 상세히 전했다. 그는 베트남 수산물 수출입 공사와 협력하여 합작 사업을 추진했고, 이를 통해 단순 교역을 넘어 현지 생산과 가공, 수출을 아우르는 구조를 만들어냈다. 당시 베트남은 개혁-개방 초기 단계에 있었고, 외국 자본과의 합작은 제도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도 송용등 씨는 정부 기관, 국영 기업, 현지 실무자들과의 신뢰를 바탕으로 하나씩 길을 열어갔다. 그의 역할은 숫자로만 평가하기 어렵다. 계약서에 적히지 않는 문화적 중개, 관행의 해석, 그리고 사람 사이의 신뢰 형성이 그의 진짜 자산이었다. 맥심에서 밴드 마스터가 보였던 즉각적인 반응은, 바로 그런 신뢰의 축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 극동으로 뻗어간 조업권, 캄차카의 바다 송용등 씨의 활동 무대는 베트남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는 베트남 수산물 수출입 공사 그리고 사할린 어업협동조합과 함께 손을 잡고, 러시아 극동 캄차카반도 인근 해역의 명태 조업권을 따내는 데에도 관여했다. 냉전의 잔재가 여전히 남아 있던 시기, 국경과 이념을 넘어선 이런 협력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캄차카반도의 명태 어장은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어장이지만, 접근과 운영 모두가 쉽지 않은 곳이다. 그곳에서의 조업권 확보는 단순한 사업 성과를 넘어, 복잡한 국제 관계와 이해관계를 조율할 수 있는 능력을 요구했다. 송용등 씨는 바로 그 지점에서 역할을 했다. 그는 자본과 기술, 그리고 사람을 연결하며, 극동 수산 자원의 새로운 유통 경로를 모색했다. 이러한 경험은 훗날 한국 기업들이 북방 경제, 극동 러시아 시장을 바라보는 데에도 중요한 참고 사례가 되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조용히, 눈에 띄지 않게 진행된 일들이었다. ■ 북한과의 합작, 또 하나의 경계 넘기 1988년 말, 그는 이미 또 다른 ‘경계 넘기’를 시도하고 있었다. 바로 북한의 먼바다 주식회사와의 협력이었다. 그는 이 회사와 모시조개 양식 합작공장 설립 계약을 체결했다. 남북 간 공식 교류가 극히 제한적이던 시점에서, 민간 차원의 이런 합작은 상당한 용기와 신뢰가 있어야 하는 일이었다. 이 계약은 단순한 경제적 시도를 넘어, 남북이 실질적으로 협력할 가능성을 시험한 사례였다. 바다라는 공간, 수산이라는 산업은 이념의 장벽을 상대적으로 넘기 쉬운 영역이었고, 송용등 씨는 바로 그 틈새를 파고들었다. 훗날 개성공단과 같은 보다 제도화된 남북 경협이 논의될 때, 그의 이런 선행 경험들은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하게 된다. 개성공단이 문을 닫는 소식을 전하는 신문 보도를 통해서 그가 개성공단에서 PX를 운영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아리랑이 울린 이유...작은 장면이 남긴 역사 다시 맥심의 그날 밤으로 돌아가 보자. 왜 베트남의 한 레스토랑에서 아리랑이 울려퍼질 수 있었을까. 그것은 단순한 서비스도, 우연도 아니었다. 그 노래는 송용등 씨가 오랜 시간 쌓아온 관계의 결과였다. 그는 한국을 대표해 무언가를 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일하고, 함께 책임지는 파트너로 인식되고 있었다. 아리랑은 이별과 견딤, 그리고 다시 만남을 노래한다. 전쟁과 분단, 가난과 이주의 역사를 품은 노래다. 그 아리랑이 베트남의 밤무대에서 연주되었다는 사실은, 적어도 내게는 한 개인의 기억을 넘어 한국 현대사의 한 단면처럼 느껴졌다. 오늘날 한·베 관계는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로까지 발전했다. 수많은 기업과 사람이 오가고, 협력은 일상이 되었다. 그러나 그 출발점에는 이름 없이 움직였던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다. 송용등 씨는 그중 한 사람이었다. 1988년 10월 19일, 동커이 거리의 맥심에서 울려 퍼진 아리랑은 공식 기록에는 남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장면을 직접 목격한 이들에게는 분명한 역사적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을 가능하게 만든 인물, 송용등 씨의 이름은 지금도 기억할 가치가 있다. 당시의 맥심 레스토랑은 이미 문을 닫았고, 현재 동커이 거리의 ‘맥심’은 홍콩 기반의 외식 기업 맥심 그룹(Maxim’s Group)이 운영하는 전혀 다른 성격의 레스토랑이다. 맥심과 아리랑, 그리고 그 밤의 놀라움은 여전히 살아 있다. 그것은 한 개인의 추억이자, 한국 기업 해외 진출 역사의 조용하지만, 결정적인 한 페이지이기 때문이다. 부산외대 베트남어과 배양수 yangsoobae@gmail.com 배양수 교수는? 한국외국어대학교 베트남어과를 졸업하고, 하노이사범대학교 어문학과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베트남 1호 한국유학생이자 1호 박사다. 베트남 문학작품인 『끼에우전』과 한국의 『춘향전』을 비교한 석사학위논문은 베트남 현지에서 많은 주목을 받기도 했다. 하노이사범대학교 어문학과에서 100번째로 박사학위를 받은 자본주의권 출신의 외국인이라는 이례적인 기록도 가지고 있다. 1995년부터 부산외국어대학교 베트남어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베트남 문화의 즐거움 』, 『중고등학교 베트남어 교과서』, 등의 저서와 『시인 강을 건너다』, 『하얀 아오자이』, 『베트남 베트남 사람들』, 『정부음곡』, 『춘향전』 등의 번역서가 있다. 2024년 12월 24일 ‘부산외국어대학교 베트남어과 30주년 기념식 및 정년퇴임식’을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