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원의 동티모르 워치
[최창원의 동티모르워치 16] ‘바유운단’ 가스전 이후 동티모르
동티모르 체류 초기 필자는 동티모르 정부 인사의 통역할 일이 있었다. 동티모르 정부 인사는 생각지 못한 질문을 불쑥 던졌다. "한국의 기술로 그레이터 선라이즈의 가스를 동티모르 쪽으로 가져올 수 있겠습니까." 그 문장을 통역하면서, 이 나라가 그 가스전에 얼마나 깊이 기대고 있는지를 실감했다. 그레이터 선라이즈는 1974년에 발견됐고 당시 이미 수십 년째 개발이 지연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방 안의 공기는 희망으로 가득했다. 이미 실현된 희망은 바유운단(Bayu-Undan) 가스전이었다. 현지 공무원들은 산유국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꼈다. 그럴 만한 근거도 있었다. 석유기금(Petroleum Fund)만큼은 국제사회에서 인정받는 제도였다. 2019년 전 세계 64개 국부 펀드 투명성·책임성 평가에서 세계 7위에 올랐고,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에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손실을 내지 않은 국부 펀드로 기록됐다. 규모가 아니라 원칙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 원칙은 일찍 흔들렸다. 석유기금법이 정한 지속가능인출수준(ESI)은 기금 총자산의 3%였지만, 2008년 이후 한 번도 지켜지지 않았다. 2009년부터 연평균 인출 비율은 법정 한도의 1.7배인 5%였고, 이 구조적 초과 인출은 16년째 이어졌다. 2025년 6월, 바유운단이 멈췄다. 20년 넘게 동티모르 살림을 떠받쳐온 주 수입원이 공식 종료를 선언했다. 남은 것은 189억 달러의 석유기금이다. 비(非)석유 GDP의 939%에 달하는 거대한 저수지지만, 더 이상 물이 들어오지 않는다. IMF는 현재 추세가 지속되면 2030년대 말 기금이 완전히 바닥날 것이라 경고했다. 동티모르 정부 자체 추산은 2034년이다. 2026년 예산안은 22억9100만 달러로 IMF 권고치(18억5000만 달러)를 4억4000만 달러 웃돌았다. 세계은행은 같은 해 재정 적자가 GDP의 50%를 넘을 것으로 전망했다. 10년간 GDP의 85%를 지출했지만 연평균 성장률은 1.3%에 그쳤다. 수치들이 가리키는 방향은 하나다. 빠른 대응이 필요한 상황이다. 빈 해저 저류층에는 CCS(탄소 포집·저장) 프로젝트가 들어설 예정이다. 지분 25%를 보유한 한국의 SK E&S가 핵심 파트너다. 운영사 호주 산토스를 비롯한 합작 투자사들은 한국·일본·호주의 이산화탄소를 동티모르 해저 지층에 봉인하는 구상을 진행 중이다. 연간 최대 1000만 톤. 실현되면 세계 최대 규모의 CCS 프로젝트가 된다. 2008년 그 방에서 던져진 질문은 가스를 동티모르 쪽으로 가져오는 기술이었다. 17년이 지나 한국은 이번에는 반대 방향으로, 탄소를 그 바다 밑으로 보내는 파트너가 되려 한다. 동티모르는 이 나라 크기에 걸맞지 않은 특별한 기록을 두 개 가지고 있다. 하나는 이웃 대국 인도네시아를 상대로 쟁취한 독립이고, 다른 하나는 호주를 상대로 거둔 국제법적 승리다. 그레이터 선라이즈를 둘러싼 해양 경계 분쟁에서 동티모르는 2016년 UNCLOS 역사상 최초의 강제조정 절차를 발동했다. 호주는 반발했지만 조정위원회는 동티모르의 손을 들었고, 협상 과정에서 불거진 호주 정보기관의 도청 스캔들은 협상 주도권을 딜리로 완전히 넘겨버렸다. 2018년 유엔 본부에서 서명된 영구 해양경계 조약은 그레이터 선라이즈 수익의 70~80%를 동티모르가 가져가는 내용을 담았다. 작은 나라가 국제법을 무기로 강대국을 상대로 만들어낸 결과였다. 2025년 11월 우드사이드(Woodside Energy)와의 LNG 처리 시설 협력협정 체결로 생산 개시 목표는 2028~2030년으로 제시됐다. 같은 해 10월, 동티모르는 아세안(ASEAN) 정식 회원국이 됐다. 독립 이후 20년 넘게 두드려온 문이다. 라모스 오르타 대통령은 한발 더 나아가 2029년 아세안 정상회담 유치를 공언했다. 재정이 빠듯한 나라가 지역 외교의 주무대를 자청한 것이다. 이 일련의 움직임이 외국들의 발걸음을 빠르게 하고 있다. 중국은 양국 관계를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로 격상한 뒤 20개 이상의 일대일로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다. 호주는 2026년 1월 총리가 직접 딜리를 찾아 3억 달러 규모의 지원을 약속했다. 각국의 셈법은 다르다. 호주는 에너지 자원과 전략적 완충지대를, 중국은 티모르해 항로의 거점을, 일본은 에너지 안보의 다각화를 보고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동티모르를 향한 외국의 관심은 석유기금이 줄어드는 속도에 반비례하듯 높아지고 있다. 재정 절벽을 향해 걸어가는 나라에 중국은 인프라를 들고 오고, 호주는 총리가 직접 날아오며, 일본은 그 바다 밑에 미래 산업의 씨앗을 심으려 한다. 독립 이후 처음으로 아세안 회원국이 됐고, 2029년 아세안 정상회담 의장국까지 공언했다. 가난하고 작은 나라가 지역 외교의 중심에 서려 하고 있다. 위기가 깊어질수록 이 나라를 둘러싼 지형도 복잡해진다. 명백해 보이는 재정 위기에도 키워 가는 동티모르의 존재감이 이번에도 전례없는 드라마를 만들 수 있을까? 그 질문을 뒤로 하고 주변국은 빠르게 반응하고 있다. 최창원 |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원 연구위원 hopeseller@gmail.com 최창원 프로필 현,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원 아세안센터 연구위원 현, 아시아비전포럼 선임연구원 현, 한국스피치웅변협회 동티모르 지부장 전,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 방문학자 전, 동티모르국립대 교수, 한국학센터장 전, UNDP 아름다운동티모르 만들기 프로젝트 자문관 한글 발전 및 한국어 세계화 공로로 대통령 표창(2025) 『테툼어–한국어 사전』, 『한국어–테툼어 사전』 동티모르 말모이팀 편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