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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기의 일본이야기18 ] 말없는 고분 속 주인공은 '기마민족'

일본인은 누구인가 1. 일본민족론: 4세기 초 스이진 천황 중심 기마민족 규슈 땅 상륙

 

일본 고고학이 가르는 역사구분으로 고분(古墳)시대란 기원 3세기부터 7세기 전후의 약 400년을 가리킨다. 이 시기 일본인은 저 세상으로 떠난 지배자를 기려 거대한 고분을 조영했다. 기나이(畿內) 오사카 평야에는 오-진(応神) 천황 능으로 알려진 콘다고뵤야마 고분(誉田御廟山古墳)은 분구 길이가 420m나 되고, 오-진의 네 째 황자로 임금의 자리를 이은 닌도쿠(仁德) 천황 능으로 알려진 다이센능고분(大山陵古墳)은 분구 길이 486m에 이르는 등 최대 규모의 고분이 출현한다. 지방에서도 오카야마(岡山)의 쓰쿠리야마(造山)고분은 분구 길이 360m, 츠쿠리야마(作山)고분은 분구길이가 260m에 이른다. 군마의 오-다테텐신야마(太田天神山) 고분도 분구 길이 210m에 이르는 등 거대 고분이 만들어졌다.

 

이런 고분이 만들어진 것은 3~4세기라고 하는데, 어떻게 이런 거대 고분이 돌연 나타난 것일까? 특히 출토된 유품 중 대륙제의 ‘금색찬연’한 부장품이 주목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말없는 이들 거대 고분에 누운 주인공은 누구일까?

 

글쓴이는 이 의문에 명쾌한 해답은 준 것이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 교수가 주장한 기마민족설(騎馬民族說)이라고 본다. 도쿄대의 이노우에 미츠사다(井上光貞) 교수는 기마민족설이 나온 배경과 의미를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1948년 5월이라면 불에 탄 빌딩이 여기저기 처참한 모습이 방치된 채 전화(戰禍)의 자취가 거리거리에 생생하게 남아 있었지만 패전까지의 억압에서 해방된 자유로운 학문적 활동이 팽배하게 용솟음쳤던 시대였다. 이때 민족학자인 이시다 에이이치로-(石田英一郞)가 사회자로서 주재한 한 좌담회에서 북방 고고학에 밝은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 씨는 야마토 조정의 기원에 대해서 전대미문[破天荒]의 설을 발표했다.

 

에가미 씨의 착상의 근저에 놓여있는 것은 4세기에서 5세기에 걸쳐 동아시아에 뚜렷한 역사현상을 풀이하여 북방계 기마민족이 속속 남하해 농경지대에 정착해 나라를 세우고 지배계급을 형성했다고 하는 사실이다. 이것이 중국북부에서는 오호(五胡)에서 16개국이 세워지고 조선에서는 고구려나 백제의 병립을 촉진했다. 고구려는 퉁구스계의 기마민족의 왕국이고, 56개국으로 된 마한(馬韓)을 통일한 백제왕조도 또한 한인(韓人)이 아닌 퉁구스 계의 부여족이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당시의 대세로 보아 그 일파가 다시 바다를 건너 일본에 도래하여 그 기마민족의 탁월한 군사력으로 왜인을 정복하여 일본의 지배자로 되었다고 해도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井上光貞, <일본의 역사> 시리즈 1, 1973, 311)고.

 

간단히 말해 4~5세기에 걸쳐 고구려를 세운 북방의 퉁구스 계의 부여족이 남하해 백제 왕국을 세우고 이어 바다를 건너 왜족을 정복해 일본의 지배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에가미 씨에 의하면 조선으로 남하한 북방계 기마민족이 일본의 왜인을 정복하려고 도모한 것에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야요이 식 문화의 근본에는 남조선과 북 규슈는 일체로 되었다는 사실과, 삼한시대 마한에 이어 변한, 진한을 지배했다고 전해지는 진왕(辰王)이라는 지배자가 외래 계의 정복자적 존재이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조선으로 남하한 북방계 기마민족은 왜인과 밀접한 남조선을 정복하여 그 지배자가 되었다고 생각되며, 그렇다면 그들은 필연 잇달아 왜인의 본거지인 일본열도의 정복을 도모하기 이르렀던 것이다.

 

에가미 씨는 다시금 이렇게 말한다. 삼한시대의 남조선은 민족적 색채가 강한데 삼국시대에 들어오면 북방계 문화로서 성질이 백제에서도 신라에서도 농후한 것이다. 이것은 북방계 기마민족의 정복 때문이라고 생각될 수 있는데 같은 것이 일본에서도 일어났다는 것이다.

 

전기고분문화에서는 보기(宝器) 또는 제기(祭器)가 주된 부장품이었던 것에 견주어 4세기 말에서 5세기를 경계로 해 양상이 바뀌어 별안간 금이나 은으로 된 관(冠), 귀걸이, 검, 쇠테[帶金具], 허리띠(腰佩], 장식 신발[飾履] 등 문자 그대로 머리에서 발끝까지 금색 찬연한 대륙 왕족의 복식 물건들이 출토되는데다가 기마전에 알맞은 대륙제의 철갑모, 기마전에 쓰이는 가는 몸통의 철촉 등도 볼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이 중기에서의 고분문화가 대륙적, 기마민족적인 성질을 갖게 된 것이며, 전기고분의 그것과는 뚜렷이 다른 것은 이 또한 기마민족의 정복의 결과가 아닐까.

 

그렇다면 이와 같은 지배자의 교체에 대해서 그것을 실증하는 문헌적 증거가 없을까. 에가미 씨는 하쓰쿠니시라스스메라미고코(ハツクニシラススメラミコト=御肇国天皇=처음 나라를 세우신 임금--글쓴이) 즉, 스이진(崇神) 천황의 미마키이리히코(御眞木入日子)라는 이름이야말로 유력한 증거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미마나(任那)의 어간은 미마이며, 나는 토지, 미마키의 키는 성(城)을 의미한다. 따라서 미마키이리히코는 ‘미마나(任那)의 왕’라는 의미였다. 이 사실에서 에가미 씨는 다음과 같이 구상한다.

 

4세기 초 스이진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기마민족은 규슈 땅에 상륙했다. 그리고는 1세기 못되는 뒤 4세기말에서 5세기 초에 강대한 왕권을 기내에 확립했을 것이다. 게다가 그 사이에 남조선 미마나(任那) 지방에서 그들은 구세력은 점차 쇠락해지고, 신라의 발흥과 고구려의 남하에 의해 미마나 국은 항상 압박을 당하는 형국이 되고 4세기 후반에는 천황 씨 등이 일찍이 미마나로 외정군(外征軍)을 보내 구세력을 회복했던 것이다.

 

이리하여 한편으로 남조선으로 쳐들어가고, 다른 한편으로 국토통일을 성취해 일단 안정기 이룩했는데, 그것이 저 거대한 고분으로 알려진 오-진(応神)왕조였다. 오-진 왕조에는 남조선에서 다수의 사람들이 귀화했는데, 그것은 몽고인 색목인(色目人)을, 만주인이 몽고인을 중용한 것과 같고 정복왕조가 자신의 유족(類族)을 이용해 피정복인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려 한 것에 다름 아니다(井上光貞, 위 책, 314).

 

 

기마민족이 일본의 지배층이 되었다면 그들은 현대 일본인의 선조이다. 몽고족의 일파인 퉁구스 계 족이 고구려에 이어 백제를 세운 부여족이라면, 또 그 일파가 바다를 건너 일본을 정복했다면 종래 군국주의 일본을 받들던 황국사관은 스스로 무너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일본은 신국(神国)이며, 신국을 다스리는 천황이 현인신(現人神[아라비토카미])이기는커녕 그 조상은 이세신궁에서 모시는 천조대신이 아니라 퉁구스 계=조선 계 기마민족의 수장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이 기마민족설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이노우에 교수는 “이 학설이 이른바 세계사적인 시야를 갖고 구축된 반면 자세한 점에서 많은 의문을 담고 있다”고 평가한 뒤 학자들이 제기한 몇 가지 비판을 들고 있다.

 

먼저 “남조선의 진왕 또한 정복자다”라는 점에 대한 비판이다. 에가미 교수가 근거로 든 것은 <위략>(魏略) 등 중국 사서에 진인(秦人, 중국 문명에 영향을 받은 변방 민)이 뒤 늦게 한족(韓族)에 들어갔다든가, 그것은 토착민이 아니라 ‘유랑인’[[流移の人]이었다든가 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라지만 동양사학자 미카미 쓰구오(三上次男)나 스에마츠 야스카즈(末松保和) 등은 “이것을 가지고 진왕이 북방 기마민족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비약”이라고 비판했다고.

 

게다가 삼한 전체의 왕으로서 지위를 유지하고 있던 진왕이 그 뒤 기록에 보이지 않게 된 것을 가지고 변진, 또는 그 일부의 지배자가 되었다고 보는 것도 증거가 없는 추측이라고. 진왕이 북방기마민족이라는 것도, 뒤에 변진의 지배자로 되었다는 것도 입증되지 못한다면 기마민족이 바다를 건너 일본에 건너 왔다는 그 가설 자체가 의문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고분 부장품의 변화도 ‘혁명적이랄 정도의 급격한’ 것이 아니라는 비판도 있다.

 

그렇다면 기마민족설을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위에서 동양사학자 미카미 쓰구오의 비판을 인용했지만 그는 야요이 시대 북 규슈의 지석묘가 한반도 남부에서 행해진 묘제인데, 이것은 가야 지방의 지배자가 북 규슈로 이동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노우에 교수가 짚었듯이 기마민족이 규슈로 침입했을 가능성은 에가미 설보다 거슬러 올라간 기원 2세기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게다가 이어 이노우에는 다음과 같이 기마민족설을 응원한다.

 

일본의 언어는 우랄알타이 계, 즉 북방적 계통의 말인데, 많은 점에서 남방 농민적 풍속·신앙을 갖는 일본인이 어떻게 그와 같은 북방적 언어를 말하는 것일까. 이런 소박한 의문을 품게 되는 것에 대해 에가미 씨의 기마민족설은 하나의 명쾌한 회답을 주고 있다. 에가미 씨의 기마민족설이 성립되지 않는다고 해도 이와 같은 의문은 의연히 풀리지 않을 것이다(井上光貞, 2012, 318).

 

결론적으로 한민족이 북방의 기마민족이라는 흔적을 고고학적으로 남기고 있다. 신라 경주의 금령총에서 1920년대 출토된 기마인물상은 그 한 가지 예일 뿐이다. 글쓴이를 포함한 한국인의 엉덩이 새겨진 몽고반점을 누가 지을 수 있겠는가.

 

참고문헌

井上光貞, <日本の歴史> 시리즈 1, 「神話から歴史へ」, 中央公論新社, 1973

江上波夫, 梅原猛, 上山春平, 中根千枝, <日本人とは何か: 民族の起源を求めて>, 小学館, 1980

 

글쓴이=김정기 한국외대 명예교수 jkkim63@hotmail.com

 

김정기 교수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행정학석사, 미국 컬럼비아대학 정치학과 대학원에서 일본 근대정치사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언론학회 회장, 방송위원회 위원장, 한국정치커뮤니케이션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언론정보학부 명예교수.

 

저서로 『국회프락치사건의 재발견』(I·II), 『전후 일본정치와 매스미디어』, 『전환기의 방송정책』, 『미의 나라 조선:야나기, 아사카와 형제, 헨더슨의 도자 이야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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