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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기의 일본이야기31] 야나기 무네요시의 조선미학

일본인은 누구인가 14 일본의 조선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의 조선미학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89~1961)는 일본에서 민예연구가, 종교철학자, 민예수집가로 다양한 분야에서 이름을 올린 인물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그의 이름에 부정적인 평가가 많다. 그 부정적인 평가에 맨 오른편에 선 이로 글쓴이는 최하림(崔夏林, 1939~2010)을 든다. 그는 1974년 「解說/柳宗悅(야나기 무네요시)의 한국미술관에 대해」를 발표해 야나기에 대해 ‘별 수 없는 딜레탕트’, ‘사상이 결여한 호사가’, ‘일개 창백한 서생’ 등 자극적인 호칭을 붙여 비방한다.

 

최하림이 붙인 비방적 호칭을 걷어내고 보면 그의 비판은 야나기의 ‘비애의 미’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물론 그 이전 시인 김지하(金芝河)가 1969년 “야나기 무네요시가 우리 미술의 본질을 선이라고 단정했다”면서 ‘비애의 미’를 비판한 것이 효시를 이룬다. 야나기가 1920년대 초반 쓴 일련의 글에서 “조선의 미를 비애의 미”라고 특징지은 것은 사실이다.

 

■ '비애의 미'라는 편파적 비평 넘어라...야나기는 "조선미는 의지의 미, 위엄의 미"도 강조

 

그는 선, 형태, 색을 기준으로 조선예술의 특질을 평가하면서 조선미술의 경우 선이 곡선을 그리며, 형태는 불안정한 모습이며, 색은 한결같이 백색을 띠고 있는 점에 주목하고 이들 한민족이 겪은 비운의 역사와 결부시켜 ‘애상의 미’, ‘비애의 미’라고 규정했다.

 

그가 비애의 미론을 처음 언급한 것은 1919년 그가 「조선인을 생각한다」에서지만, 본격적으로 주장한 것은 1922년 발표한 「조선의 미술」과 「조선도자기의 특질」에서다.

 

그런데 ‘비애의 미’ ‘애상의 미’와 같은 어휘는 툭 불거져 나온 걸까. 글쓴이 생각으로는 그의 미학의 본질은 와비사비(侘び寂び= 한적한 쓸쓸함)인 점을 감안하면 그 미학의 연장선에서 그렇게 규정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최하림이 조선 산수화를 예로 들어 “한마디로 산수화는 선의 예술이며 선에 의해서 산수화의 사상이 요해(了解)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며 “산수화가 서양화 같은 존재의 다이내믹한 감정을 사상하고 한없이 쓸쓸한 감정을 자아내는 것은 선이 생성과 소멸의 유전성(流轉性)을 내포하고 형이상학적 무(無)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라고 풀이한다.

 

 

여기까지는 최하림이 미술비평가로서 야나기가 조선미술의 특질로서 규정한 선을 그 나름대로 해석한, 예리한 비판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미술비평의 영역을 넘어 야나기가 비애의 미로 형상화한 선이 실은 일제의 식민정책에 영합한 결과라고 몰아친다. 다시 말하면 최하림은 한국인이 빠지기 쉬운 함정, 곧 반일 이데올로기의 틀로 야나기를 재단한 것이다. 그는 이런 반일 이데올로기의 틀에서 야나기가 규정한 조선미술의 특질은 식민사관의 미학이라고 간단히 단정한다(김정기, 2011, 313).

 

이러한 비평을 어떻게 볼 것인가? 많은 한국인들이 반일정서에 지니고 있는 역사적 현실에서 그가 반일 이데올로기에 젖어 있다고 해서 탓할 일만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미술비평가 최하림의 처지는 달라야 하지 않을까? 반일 이데올로기에 함몰되어서는 시쳇말로 ‘외눈박이’의 함정에서 헤어 나오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가지고는 야나기 무네요시의 전체상을 보기 어렵다.

 

재일 고고학자 이진희(李進熙, 1978, 54)는 최하림이 야나기의 1930년대 논문을 무시한 ‘편파적인(片手落ち)’것이며, 다른 일본의 야나기 연구자가 짚은 대로 야나기는 1920년대 이미 조선미를 ‘비애의 미’뿐만 아니라 ‘의지의 미’, ‘위엄의 미’, ‘남성의 미’, ‘공고(鞏固)한 미’라고 표현하고 있다(中見眞理, 2003, 105)는 점에서 보면 최하림의 비평은 조선도자를 보는 정합적인 미의식과는 거리가 먼 것(김정기, 2011, 313)이리라.

 

그가 이른바 ‘비애의 미’론을 주장하기 훨씬 전 1916년 아사카와 노리타카(浅川伯教: 야나기에 조선도예의 길을 터준 아사카와 다쿠미(浅川巧)의 형)의 안내를 받아 경주 토함산의 석불사(석굴암)을 둘러보고 쓴 「석불사 조각에 대해」를 보면 ‘비애의 미’는커녕 ‘위엄의 미’, ‘장엄의 미’, 게다가 ‘괴기함’의 미로 소묘한다.

 

그는 사천왕상을 보고는 순수한 조선의 예술을 만났다며, “악귀를 밟고, 그 키 큰 모습에는 범상치 않은 아름다움이 있다”고 말한다. 또한 굴 안에 있는 부처의 십대 제자 상을 보고는 “커다란 머리, 쏘는 듯 한 눈, 구부러진 코, 긴 턱, 처진 귀... 이 얼마나 놀라운 그로테스크인가”라고 감탄한다. 글쓴이의 사견이지만 「석불사 조각에 대해」는 지금 보아도 한 치의 모자람이 없는 다큐멘터리의 진수이다.

 

 

■ 야나기 "조선예술의 파괴자 히데요시"라며 파괴되지 않은 '석굴암' 극찬

 

게다가 야나기는 이 글에서 임진왜란을 일으킨 왜장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7~1598)를 조선 문화 파괴의 원흉으로 보고 있다.

 

그는 석굴암이야말로 조선예술의 고유성을 나타내는 동양의 영원한 옛 예술이라고 극찬하면서, 히데요시가 바로 이런 옛 예술을 파괴한 장본인이라고 짚는다.

 

이들 재료가 모두 석재이기 때문에 다행히 풍우화재와 왜구의 난를 면하여 오늘날까지 보존된 것이다. 오늘날 조선의 옛 미술을 찾을 때, 불행히도 고대 건축인들이 신앙과 기능을 바쳐 이룩한 신라시대 건축은 볼만하 것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이것은 무섭다고 해야 할 우리 선조의 죄일 것이다(강조-글쓴이). 종종 역사가들이 원망의 붓을 거듭하여 들었듯이, 분록쿠임진(文祿壬辰)전쟁은 조선예술에 대해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할 무의미한 박해였다(강조-글쓴이)...

기록에 의하면 명나라 “만력(萬曆) 21년 조선 선조26년 계사 5월[우리 분로쿠2년] 히데요시의 왜구들은 불국사를 불태웠다. 대웅전, 극락전, 자하문 그 밖에 2,000간이 모두 병화로 소진되었다”고. 병사들은 실로 석불사에도 아주 가까이 갔던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산에 둘러싸여 있어서 그들의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이다. 왜구의 재화가 이 굴원까지 미치지 았았다는 게 고맙기 이를 데 없다(柳宗悅, 1984, 158~159, 강조-글쓴이).

 

■ 막사발의 미...일본의 국보가 된 조선 막사발에 감탄

 

우리는 야나기가 거론한 비애의 미를 식민사관의 미학이라고 단정하는 것이 단락적이라고 평가했지만 그렇다면 그의 조선예술을 보는 눈은 어디에 머물고 있는 것일까?

 

그는 조선의 막사발이지만 일본으로 건너가 국보가 된, 교토의 다이도쿠지의 분원인 고호안(孤蓬庵)에 소장된 기자에몬이도(喜左衛門井戶)를 보고 다음과 같이 감탄한다. 이 감동의 울림 안에 그의 조선미술관이 그대로 드러난다.

 

훌륭한 차완이다. 그렇지만 어쩌면 이다지도 평범한가. 그렇지만 그것으로 좋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것이다. 바로 그것으로 좋은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다시 독자에게 말하고자 한다. 담담하고 파란이 없는 것, 계획성도 없는 것, 솔직한 것, 자연스러운 것, 무심한 것, 사치스럽지 않은 것, 과장이 없는 것, 그것이 아름답지 않을 수 있는가? 겸손하고 검소하며 장식이 없는 것, 그것은 인간의 경애를 받아야 마땅하다...

자연스러운 것은 건강하다. 아름다움에는 여러 가지가 있어도 건강함을 이기는 아름다움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건강함은 정산적인 상태이기 때문이다.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이기 때문이다(柳宗悅, 1984, 195~196)

 

참고문헌

김정기, 《미의 나라 조선》, 한울아카데미, 2011

최하림, 「柳宗悅의 한국미술관에 대해」(해설), 《한국과 예술》, 이대원 옮김, 지식산업사, 1974

李進熙, 「李朝の美と柳宗悅」, 《季刊三千里》, 1978 春戶

柳宗悅, 《朝鮮とその芸術》, 日本民芸協会 編, 1972

--. 《朝鮮を想う》, 筑摩書房, 1984

中見真理 《柳宗悅時代と思想》, 東京大學出版会, 2003

 

글쓴이=김정기 한국외대 명예교수 jkkim63@hotmail.com

 

김정기 교수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행정학석사, 미국 컬럼비아대학 정치학과 대학원에서 일본 근대정치사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언론학회 회장, 방송위원회 위원장, 한국정치커뮤니케이션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한국외대 사회과학대학 미디어커뮤니이션 학부 명예교수.

 

저서로 『국회프락치사건의 재발견』(I·II), 『전후 일본정치와 매스미디어』, 『전환기의 방송정책』, 『미의 나라 조선:야나기, 아사카와 형제, 헨더슨의 도자 이야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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