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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기의 일본이야기22] 원령 모티브...일본의 전통연극 ‘노’

일본인은 누구인가5. 일본인의 신앙: 원령(怨靈)이 모티브가 된 문학·예술

 

지난 번 이야기에서 짚은, 조선의 원혼이 일본에 건너가 “원령문화로 꽃 피웠다”는 서술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중심에는 원령이 문학-예술의 모티브로 들어서 있다는 것이다. 이번 이야기에서는 원령을 모티브로 삼은 예능으로서 일본의 전통연극 노-(能)를 살펴보기로 하자. 무릇 노-란 무엇인가?

 

노-는 일본의 전통예능의 하나로 쿄-겐(狂言:, 가부키 연극)과 함께 남북조 시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계속 실연되는 세계에서도 가장 오랜 연극생명과 전통을 가지고 있다.

 

독자의 양식을 갖는 노-무대에, 노-가면을 쓰며, 제아미(世阿弥)가 ‘가무이도(歌舞二道)’라고 지적하듯이 춤으로 높여지고, 추상화한 연기와 노래[謠(우타이)]와 반주음[囃子(하야시)]에 의한 음악 요소의 융합된 연극이다. 메이지 이후 ‘노가쿠(能樂)’라고 부르는 편이 일반화되었지만 ‘사루가쿠(猿樂)’ 또는 ‘사루가쿠노 노-’로 불러지며 제아미는 사루가쿠(申樂)이라는 글자로 이에 등치시키고 있다.

 

‘노-(能)’란 가무를 딸리고 연극적 전개를 갖는 예능의 의미이며 덴가쿠(田樂)의 노-, 엔넨(延年)의 노도 행해지고 있는데, 사루가쿠의 노-와 같은 발달을 이룩하지 못했다. ‘요쿄쿠(謠曲)’는 노-의 성악부분을 가리키며 또한 각본을 말한다(<일본대백과전서>, 小学館 간).

 

이 사전적 정의에는 노-연극의 핵심이 되는 원령과 진혼이 빠져있어 과연 노-를 이해하는데 얼마나 도움이 될지 의문이 든다. 일본의 재야사학자가 말하듯 “원령 신앙은 세계로 통하는 예술을 탄생시켰다”면서 “그것이 노-(能)이다”라고 했다. 그는 이렇게도 말한다.

 

원령과 진혼--이 두 관념이 이즈모 대사(出雲大社)를 지었으며, <만요-슈->을 엮어냈고, ‘성덕’ 태자를 낳았으며,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을 지어냈다(井沢元彦, <逆説の日本史>시리즈 8, 2014, 349~350).

 

노-가쿠를 요새말로 거칠게 말하면 우리나라의 심청전 또는 춘향전과 견줄 수 있는 일본의 전통 뮤지컬이다. 이 노-연극을 창시하고 개척한 사람은 제아미(世阿弥)이다. 그는 누구인가? 그는 14세기 중반에서 15세기 중반까지 산 인물로 “노-가쿠의 완성자이며, 이 전통 연극의 배우이자 각본가이며, 연출가이자 작곡자이며 연극이론가”(위 책, 350)로 일컬어지는 인물이다. 제아미는 당대 권력자 아시카가 요시미츠(足利義滿: 무로마치 막부의 제3대 장군-글쓴이)의 총애를 받고 아버지 칸아미(觀阿弥)의 야마토사루가쿠(大和猿楽)의 흉내극[物まね]을 이어 받아 가무중심의 훌륭한 예능을 창시했다.

 

그러나 그는 요시미츠가 죽고 요시노리(義敎)가 장군자리에 오르자 곧 버림받아 1434년 72세 나이에 사도로 유배당했다. 마에하라 다케시는 제아미의 귀양 벌을 “미이라를 취하여 미이라가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평한다. “왜냐 하면 제아미만큼 원령을 사랑하고 원령을 주인공으로 한 예능을 창조한 사람은 없기 때문”이라고.

 

이제 그가 완성한 노-가쿠 세계에 들어가 보자. 제아미의 노-는 ‘유현(幽玄)’이라는 공간이 설정되는데, 유현은 원령과 깊은 관계를 맺는다. 제아미가 창시한 노-의 형식으로 가장 평가받고 있는 것은 무겐노-(夢幻能, 이하 ‘몽환노-’)라고 부르는 노-가쿠이다. 그는 전장과 후장으로 구성되는 복합몽환노-의 창시자이다.

 

복합몽완노-는 이 세상에 강한 집념을 갖는 원령을 시테, 즉 주역이며 많은 경우 여러 나라를 방랑하는 떠돌이 중[旅僧]이 와키 즉 협역이라는 인물을 설정한다. 시테는 전장에서 그 고장에서 살았던 인물로서 나타나 와키가 물어 점점 그 정체를 드러낸다. 그리고 아이 즉, 교겐노-가타(狂言方: 우수개 소리 전담 배우)의 말이 후장에서 주역은 원령 그 자체가 되어 나타나 생정의 한을 말한다. 협역은 그와 같은 주역의 한을 들어주는 것으로 원령을 진혼한다. 그것으로 거의 모든 경우 원령을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몽환노-의 이야기

 

몽환노-의 현저한 특징이 하나가 시테[주역]가 망령(亡靈)이라는 것이다. 무대의 막이 열리면[실은 막은 없다] 와키[주인공 시테의 협역]이 등장한다. 와키로 나오는 흔한 인물은 떠돌이 중[旅の僧)이다. 중이 지나다니는 곳은 명소(名所), 고적(古蹟), 옛 전장(戰場)과 같은 장소다. 당연 거기에는 명소의 유래나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떠돌이 중은 그것을 생각하고 있자, 또 다른 인물[고장의 사람]이 나타나 당시의 일을 상세히 회상한다.

 

그러자 중은 묻는다. 당신은 어쩌면 “아무개[○○○]의 망령이잖나”라고. 그러면 그 인물은 ‘문뜩’ 사라진다. 사라진다는 것은 퇴장한다는 것이다. 하시가케(橋掛け)라 부르는 노-무대로의 통로로 사라진다. 그 통로가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잇는 연락구(連絡口)’인데, 거기로 돌아간다는 것이, 즉 ‘문득’ 사라진다는 것이다.

 

제아미의 몽환노-는 전장과 후장으로 구성되는데 그것을 복식몽환노-이다. 주역 시테의 망령이 사라지면 와키도 일단 퇴장하고 그 뒤가 후장(後場)이 된다. 후장에서는 망령이 ‘현역의 즈음’의 모습으로 돌아와 괴로움과 슬픔을 털어놓는다. 이에 대해 떠돌이 중은 정중하게 조문을 한다. 즉 진혼을 한다. 그러면 망령은 성불할 수 있다는 기쁨을 나타내고 다시 저 세상으로 돌아간다.

 

이것이 몽환노-의 기본적인 패턴이다. 이제 몽환노-의 구체적인 한 작품을 통해 그 패턴이 나타난 모습을 살펴보자. <아츠모리>(敦盛)란 작품인데, 겐페이(源平) 전쟁 때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겐페이 전쟁이란 1180~1185년간에 두 무가 집안인 겐지(源氏)와 헤이시(平氏)간에 일어난 전국적인 내전을 가리킨다. 이야기 줄거리는 후지와라노 겐지(藤原源氏) 쪽의 쿠마가이지로-나오자네(熊谷次郞直実)에 목을 베인 헤에케(平家)의 젊은 무사 다이라노 아쓰모리(平敦盛)의 일이다.

 

아쓰모리는 피리를 잘 부는 명수인데 아직 소년이라 할 수 있는 정도로 젊은 무사였다. 미나모토노 요시쓰네(源義経: 헤이안 시대 말기 무장)가 ‘히요도리코에[ひよどり越え: 고베시 서쪽 산길로 옛날 겐페이(源平) 고전장]’에서 기습작전에 성공해 헤이케 무가는 멸문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그 때 헤이게 군이 당황해 앞 바다의 배로 도망을 시작했을 때 아쓰모리가 불운하게 나오자네에 만나 저지당한 것이다. 나오자네도 ‘소년’을 베어 공로를 세우려는 마음은 전혀 없었다.

 

다만 눈에 띈 갑옷[具足(요로이)]을 입은 건사한 무사가 있었기 때문에 불러 세워 싸움을 걸은 바, 그것이 의외로 나이 어린 무사였다는 것이다. 나오자네는 스스로 공명을 위해 어린 목숨을 끊은 것을 후회하고 호-젠(法然) 스님[上人]의 제자가 되어 출가했다. 출가명은 렌쇼-(蓮生)라고.

 

작품 <아쓰모리>에서는 우선 이 랜쇼-법사가 옛 전장인 스마노우라(須磨の浦)로 다가오는 것으로 시작한다. 떠돌이 스님 몫으로 분장한 렌쇼-는 스마노우라에서 낯선 젊은이를 만난다. 언듯 보아 고장 사람인 것 같지만 너무나 옛 일에 정통하다. 어쩌면[이 사람이 아츠모리의 망령인가] 라고 생각하자 아니나 다를까 젊은이는 “문뜩 사라진다.”

 

 

후장에서는 젊은 무사의 모습으로 아쓰모리가 등장한다. 밤이 되어 렌쇼-가 오직 공양을 위해 염불을 읊고 있자 옛날 그대로 모습으로 등장한 아츠모리가 헤이케(平家)가 패배해 도읍을 버리고 낙향한 이래 옛 이야기를 하면서 마지막으로 렌쇼-의 조문을 감사하고 한을 풀고 돌아간다. 이와 같은 형태로 노-는 몇 번이고 구원받지 못한 망령을 무대로 불러내어 정중히 진혼하여 다시 저 세상으로 보낸다.

 

보편적인 모티브 원령과 진혼

 

이렇게 원령과 진혼은 노-가쿠의 핵심적 모티브가 되고 있는 것인데, 노-가쿠뿐만 아니라 원령과 진혼이 일본고전 문학 전반에 걸쳐 보편적인 모티브가 되고 있는데 놀란다.

 

일본의 불후의 고전이라고 일컬어지는 <만요슈>(万葉集)나 <고킨와카슈>(古今和歌集)도 물론이고, 세계최초의 장편소설이라고 불려지는 <겐지모로가타리>(源氏物語)도 원령 진혼을 이야기의 줄거리로 삼고 있다. <겐지모노가타리>에서 주인공 히카리겐지(光源)의 애인의 한 사람으로, 게다가 겐지에 버림받은 콧대 높은 로쿠조미야무슨도코로(六条御息所)의 원령이 내리는 지벌이 이야기의 중심 줄거리를 이룬다.

 

그녀의 생령(生霊: 산 사람의 원령)이 겐지의 연인 유가오(夕顔), 그리고 전의 정처(正妻) 아오이노우에(蔡の上)를 죽이고, 그녀의 사령(死霊)은 뒤의 정처 무라사키노우에(紫の上)를 괴롭혀 애비(愛妃) 온나산노미야(女三宮)에 무도한 일을 치르게 한다. 이런 내용을 보아 <겐지모노가타리>가 오리구치시노부(折口信夫)가 짚듯이 원령진혼의 이야기라는 말할 나위도 없다. 이와 나란히 훌륭한 ‘모노가타리’로 여겨지는 <헤이케이모노가타리>(平家物語)도 헤이케 일가의 원령진혼의 이야기이다.

 

몰론 한국에도 원혼을 달래야 한다는 신앙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전라도 지방의 씻김굿이나 살풀이굿도 죽은 자를 씻어 주거나 원혼을 달래는 의식일 것이다. 최명희의 대하소설 <불꽃>에 나오는 망혼제는 ‘몽달귀신’을 달래는 것을 소주제로 삼고 있다.

 

이 원령 진혼의 이야기가 전하는 현대적 메시지는 무엇인가? 사람은 신이 아닌 이상 반드시 죄를 진다. 죄의 표적이 된 사람은 한을 품고 죽는데 그 영혼을 거두지 않으면 원령이 되어 지벌을 내린다. 그러니 죄를 짓지 말자, 지은 죄에 회개하자, 이 깨달음이야 말로 오늘을 사는 우리에 주는 메시지가 아닐까.

 

한을 품은 사람, 이 세상의 미련을 남긴 사람은 반드시 원령이 되는데 이를 함부로 놔두면 지벌을 내린다. 따라서 원령은 단순한 망령이 아니라 ‘신’인 것이다. 때문에 원령신앙이라는 ‘종교’가 근간이 되는 ‘종교극’으로 망령이 주역이 될 수 있는 것이다(井沢元彦, 시리즈 8, 2014, 355~356).

 

참고문헌

梅原猛, <神と怨霊: 思うままに>, 文藝春秋社, 2008

井沢元彦, <逆説の日本史> 시니즈 8: 中世混沌編>, 小学館, 2014

 

글쓴이=김정기 한국외대 명예교수 jkkim63@hotmail.com

 

정기 교수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행정학석사, 미국 컬럼비아대학 정치학과 대학원에서 일본 근대정치사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언론학회 회장, 방송위원회 위원장, 한국정치커뮤니케이션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언론정보학부 명예교수.

 

저서로 『국회프락치사건의 재발견』(I·II), 『전후 일본정치와 매스미디어』, 『전환기의 방송정책』, 『미의 나라 조선:야나기, 아사카와 형제, 헨더슨의 도자 이야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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