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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기의 일본이야기26] 한반도 어부의 노래 ‘세노야’의 비밀

일본인은 누구인가9: 일본인의 신앙: 소노 신(園神)과 카라 신(韓神)

김정기 교수의 일본인은 누구인가9: 일본인의 신앙: 소노 신(園神)과 카라 신(韓神)

 

 

영국 외교관이자 일본어에 능통했던 아스턴(W. J. Aston)은 일본이 막부를 청산하고 근대로 들어오는 길목에서 1905년 <신도>(Shinto: The Way of the Gods)라는, 주목할 만한 저서를 출간했다.

 

그는 이 책에서 신도를 세계의 대종교 가운데서 ‘가장 뒤쳐진 종교’라고 낙인찍고는 그 논거를 여러 가지 들고 있다. 신도의 다신론에는 최고신이 없다는 점, 우상이나 도덕률이 상대적으로 없다는 점, 령(靈)의 개념을 인격화하는 것이 약하는 점, 그것을 파악하는 것에 방황하고 있다는 점, 내세의 상태를 실제 인식하고 있지 않다는 점, 일반 대중에 열렬한 신앙이 없다는 점을 두루 내세웠다.

 

글쓴이가 아스턴의 신도관에 주목한 것은 일본의 신도에는 ‘한신(韓神)’이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그가 일찍이 간파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교수는 아스턴이 수렴한 신도 관에는 그 시점에서 한계와 오해가 있다 면서도 다음과 같이 짚었다.

 

아스턴의 신도관에는 이런 오인을 내포하고 있음에도 1905년이라는 시점에서의 신도에 대한 고찰로서는 괄목할만한 내용을 보유하고 있었다. 예컨대 「신도에는 조선(朝鮮)요소의 결정적인 흔적이 있다. 카라카미(カラカミ[韓神]는 천황의 궁정에서 숭배 받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 논증은 충분하지 않지만 그 착안은 예리하다(上田正昭, 1996, “アストンの神道”, 15).

 

위에서 우에다 교수가 짚은 ‘신도에는 조선요소의 결정적인 흔적’이란 무엇인가? <엔키시키>(延喜式) 신명장(神名帳)은 당시 신기관(神祇官)이 유서(由緖)가 바르고 영위가 있다고 생각하는 신사로서 2,861사와 3,132 좌의 신의 명부를 기록하고 있다.

 

이 중 신명장 상권에는 궁중에서 각별히 모시는 ‘궁중신 36 좌(宮中神三六座)’의 이름이 나와 있다. 여기에는 ‘궁내성에 계시는 신 3좌’[宮內省に坐す神三座]로서 소노노카미 야시로[園神社, 이하 ‘소노신 사당’] 1좌와 카라노카미 야시로(韓神社, 이하 ‘한신 사당’) 2좌라고 명기되어 있다.

 

헤이안(平安) 경 국내성에서 모시는 소노신 사당은 궁내성 남쪽에, 한신 사당은 국내성 북쪽에 들어서 있는데, 이 두 사당에서 모시는 소노신과 나란히 한신의 제사는 매년 2월 열리는 가스가 제(春日祭) 뒤 축일(丑日), 매년 11월 신상제(新嘗祭) 뒤 축일에 엄숙히 집행되고 있다(上田正昭, 위 책, 86).

 

이 소노신과 한신은 누구인가? 우에다 교수는 <오-야마토진자추신조>(大倭神社注進状)라는 고문헌을 전거로 이들 신의 족보를 밝히고 있다. 소노신은 오-모노누시 신(大物主命)이며, 한신은 오-나무치 신(大己貴神)과 스쿠나비코나(少彦名) 신이라는 것이다. <기기>신화에 등장하는 이들 신은 이전 이야기에서 보듯 이즈모(出雲)에 나라를 세운 신으로 되어 있다.

 

다시 이전 이야기에서 보듯이 <고사기> 상권 신대권에는 오-나무치 신과 스쿠나비코나 신이 한반도를 고향으로 둔 신이다. 그들이 서로 도와 나라 세우기에 나섰다는 대목 뒤이어 이른바 오-토시 신(大年神)의 족보가 나온다.

 

“고로 이 오-토시 신이 가무이쿠스비 신(神活須毘神)의 딸 이노히메(伊怒比売)와 혼인해, 오-쿠니미타마신(大国御魂神), 다음으로 카라노카미(韓神), 다음으로 소호리 신(曾富理神), 다음으로 시라히 신(白日神), 다음으로 히지리 신(聖神)을 낳았다”(<고사기> 상권 6 대국주신 조, 6-8, 강조 글쓴이).

 

여기에서 말하는 ‘카라노카미’는 물론 한신이며, ‘소호리 신’과 ‘시라히 신’도 신라 계 신이다. 오-토시 신이 한신을 낳았다는 것은 오-토시가 자신이 한신이기 때문에 당연한 이야기다. <고사기>는 한신 스사노오가 오-야마츠미 신(大山津見神)의 딸 가무오-이치히메(神大市比売)와 혼인해 오-토시 신을 낳았다고 적고 있다(<고사기> 상권, 5-6 “스사노오 신의 야마타노오로치 퇴치” 조). 그렇다면 확실하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국내성 세 사당에서 모시는 소노신과 한신이 <고사기>가 말하는 오-토시 신의 족보에 나오는 ‘한신’ 계열과 같은 신이라고 비정할 수 있게 된다.

 

 

■ 한신에 대한 반감...한신이 적어도 그 이전부터 8세기 중반까지 제사

 

그런데 일본에서 꽤 이름만 몇몇 역사가들이 이를 근거로 <고사기>에 등장하는 ‘한신’이란 부분이 위서(僞書)라는 주장을 제기하고 있다. 이렇게 주장하는 논거는 궁내성의 ‘소노신 사당’(園神社, 1좌)와 ‘한신 사당’(韓神社, 2좌)모시는 3좌의 한신은 헤이안(平安) 천도 이후 비로소 헤이안경(平安京)에서 제사지냈던 신이라는 것이다. 헤이안 천도가 794년 간무(桓武)천황(재위 781~806) 때 이루어 졌음에 비추어 712년 정월에 성립된 <고사기>에는 기록될 수 없는 오류라는 것이다.

 

이는 언뜻 보아 그럴 듯한 논거인 것처럼 들린다. 예컨대 나카자와 겐메이(中沢見明)는 <고사기론>(古事記論)에서 <고사기>를 ‘위서(僞書)’라고 주장하는 유력한 근거로 이 ‘오류’를 들고 있다. 또한 니시다 나가오(西田長男)의 경우 <일본신도사연구>(日本神道史硏究)에서 현 <고사기>를 “헤이안 경 초기에 성문(成文)된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이들뿐만 아니다. <기기> 신화연구의 큰 전기를 마련했다고 평가를 받는 쓰다 소우키치(津田左右吉)는 그의 저서 <일본고전의 연구>에서 문제의 오-토시 신 족보에 언급하면서 “신대사의 신 계보가 이미 생긴 뒤에 그것을 근거로 하여 만들어진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민속학자 야나기타 쿠이오(柳田国男)도 “후세 사람이 만든 방주(旁注: 곁들인 주석)가 <고사기>의 본문이 된 것”이라고 적고 있다. 국문학자인 오리구치 시노부(折口信夫)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나도 이 계보가 뒤에 ‘억지로 꾸며 넣은 것’이라고 생각 한다”고 말하고 있다(上田正昭, 1996, 87).

 

그러나 우에다 교수가 밝힌 대로 이 신들을 위한 제사가 헤이안 경으로 천도 이후 처음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 사실(史実)로 드러났다. 이 사실을 확실히 적은 것이 806년에 나온, <신쇼갸쿠쵸쿠후쇼>(新抄格勅符抄)라는 이름의 첩(牒: 나무에 쓴 문헌)에 쓰인 칙령이다. 765년에 나온 이 칙령에 ‘소노신 이십호 한신 십호’(園神二十戶 韓神十戶)의 간베(神戶: 신사에 소속되어 조세와 부역 등을 바치던 농민)를 들면서 “아울러 사누키 국(讚岐國)이 같은 해 봉충(奉充)했다”고 명기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같은 해’[同年]라고 적은 것은 ‘천평신호원년(天平神護元年)’ 곧 765년이다(上田正昭, 1991, 157).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에다 교수는 이는 소노신이나 한신이 적어도 그 이전부터 8세기 중반까지 제사가 이어져 왔다는 ‘방증(傍證)’한다고. 다시 한신 사당과 소노신 사당의 간베가 대대로 사누키 국으로부터 충당되어 왔다는 것은 <엔키시키>에 ‘소노 카라 양신 사당은 사누키 국 봉호(封戶)’라고 적은 것에서도 알 수 있다고(上田正昭, 1996, 89).

 

그렇게 되면 <고사기>의 한신 부분이 위서(僞書)라든가 헤이안 초기 성문(成文) 설은 낭설로 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은 이와 같이 엉터리 주장이 나오는 배경에는 일본에서 ‘한신’에 대한 반감이 얼마나 강한지를 보여주는 한 가지 예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신들의 옛 역사서까지 ‘위서’라고 한데서 그들의 반한 정서를 어느 정도인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잖은가.

 

■바다를 건너온 해신...아마테라스오미카미 이미지

 

이 궁중에서 모셔진 한신 들이 궁중무녀가 부르는 카구라(神楽)에 등장하는 것이 눈길을 끈다. 궁중 카구라[御神楽]란 황실과 인연이 깊은 신사에서 신을 제사지낼 때 바치는 궁중 가무인데, 그 가무가 ‘한신’에 바쳐지는 것이다. 이것이 헤이안(平安) 시대 궁중 카구라인 것이다. 이 한신은 누구인가가 문제가 되는데 그는 해신으로서 아마테라스오미카미(天照大御神)의 이미지와 겹친다.

 

문제는 이 카구라 노래의 가사가 ‘만요카나(万葉仮名)’로 적고 있어 매우 읽기 어렵다는 점이다. 만요카나란 나라 시대(710~784) 한자의 차자(借字)로 적은 일본 고어인데, 우리나라 신라 시대 쓰였던 이두나 향찰에 대응된다. 두 구절로 된 카구라 노래는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되어 있다.

 

1. 미시마 목면을 어께에 걸치고 우리 한신을, 카라오기 세무야, 카라오기 세무야,

2. 야히라데(八葉盤: 신에 절을 할 때 8번 손뼉을 치는 일 또는 판-글쓴이)를 손에 들고 우리 한신을, 카라오기 세무야, 카라오기 세무야

원문 1. 見志万由不, 加太仁止利加介, 和礼加良加見波(乃), 加良乎支世武也, 加良乎支, 加良乎支 世牟也 2. 也比良天乎, 天仁止利毛知天, 和礼可良加見毛(乃), 加(良の乎)支,世牟哉, 加良乎支, 加良乎支, 加良乎支 世牟也. (三島目綿, 肩にとりかけ われ韓神は(の), からをぎせむや, からをぎ, からをぎせむや.やひらでを, 手にとりもちて, われからかみも(の), からをぎせむや からをぎ, からをぎせむや).

위의 1. 2.는 나베시마가 본(鍋島家本)의 <카구라우타>(神樂歌)의 만요카나(万葉仮名) 원문, ( )는 현대 일본어, (上田正昭, 앞의 책, 1991, 156 재인용).

 

이 카구라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밝혀 보자면 두 가지 의문을 풀어야 한다. 그것은 첫머리에 나오는 ‘미시마 목면을 어께에 걸치고 [있는] 우리 한신’이 누구인가? 또 이어지는 구절에서 거듭해 나오는 ‘카라오기 세무야’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먼저 ‘카라오기 세무야’의 경우 만요카나로 ‘加良乎支世牟也’라고 적었다. ‘加良乎支’을 두고 일찍이 에도 시대 중기 국학파의 거두인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를 비롯해 국문학자인 오리구치 시노부 (折口信夫) 등은 ‘枯萩(카라오기)’ 곧 ‘마른 싸리나무’로 해석했다. 이렇게 되면 ‘마른 싸리나무’는 카구라 가무에서 춤을 추는 닌죠(人長: 궁중무녀의 우두머리)의 무구(舞具)가 되고 만다. 그러나 우에다 교수는 ‘카라오기’를 ‘韓招ぎ 로 해석해 바로 잡아 지금은 통설로 굳어졌다. 이렇게 되면 “우리 한신을 한국 풍으로 모셔오자, 모셔오자”로 된다고 그는 풀이했다.

 

 

다음으로 미시마 목면을 어깨에 걸치고 있는 ‘우리 한신’은 누구인가에 대해 우에다 교수는 백제에서 바다를 건너온 한신임을 밝혀냈다. 그는 ‘마른 싸리나무’ 식의 해석을 ‘속류사론(俗流史論)’이라고 비판하면서, ‘미시마 목면을 어께에 걸치고’(見志万由不, 加太仁止利加介[만요카나]-->三島木棉, 肩にとりかけ[현대 일본어])에 주목한다. 그는 이 가무가 “왜 미시마 목면을 어께에 걸치고 한신을 한국 풍으로 모셔오자”라고 노래를 부르는가?

 

그 수수께끼는 미시마 신(三島神) 자체가 백제로부터 건너 온 것을 밝히면 비로소 풀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문헌 검증을 통해 미시마 신이 이요국(伊矛國) 오-야마쓰미신사(大山積神社)에서 모시는 와타시 대신(和多志大神)이라며서, 이 신이 백제에서 ‘바다를 건너 온’[와타(渡)] 신이라 짚었다(上田正昭, 위 책, 158~159).

 

■ 양희은이 부른 ‘세무야, 세무야’...우리 어민들의 뱃노래

 

여기서 글쓴이는 다소 대범한 추리를 해본다. 그 옛날 청동기 이래 우리 문물이 대량 바다를 건너갔을 때 “...세무야, ...세무야”라고 부른 우리 어민들의 뱃노래가 묻혀 가지 않았을까.

 

<고사기> 유라쿠(雄略) 천황 조에 우네메(采女: 황후의 시중 일을 맡은 궁녀)를 주인공으로 하는 세 수[三首]의 노래가 나오는데, 이 노래가 아마가타리우타(天語歌: 이하 ‘천어가’)라고 적혀 있다. 그런데 이 천어가의 경우 아마하세즈카이(天馳使: 야마토 조정의 해운과 어부의 공물을 관장하는 관인, 이하 ‘어물관인’)들이 전승자로 전해진다. 실제 <고사기>상권에 적혀 있는 네 수의 ‘간가타리우타’(神語歌, 이하 ‘신어가’) 중 첫수는 이 어물관인이 읊은 것으로 나와 있다.

 

우에다 교수는 이 천어가의 경우 전승자들이 아마가타리무라지(天語連, <신찬성씨록>이 분류한 신(神)별 성씨의 하나-글쓴이)나 그 휘하 아마하세즈카이(海人駆使)들이 아닌가 추정하면서 <고사기> 상권에 나오는 네 수의 장가[四長歌] 중 첫 수 끝 구절에 나오는 “고토노가타리고토모코오바”(ことの語りごともこをば: 일의 차제는 이렇다)를 이시타후야 아마하세즈카이가 읊은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고 짚었다(위 책, 97). 이시타후야란 아마하세즈카이라는 말에 선행하는 마구라고토바(枕詞: 으레 나오는 관형사)이다.

 

그렇다면 이 천어가의 ‘천’ 즉 ‘아마’는 현대 일본어에서도 바다이자 하늘인 용례를 참작해 이를 바다라고 읽을 수 있고, 그렇게 되면 그것은 뱃노래가 된다. 이점에 주목하면 그것은 어물관인들이 어민들과의 잦은 접촉에서 익힌 뱃노래를 전했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위에서 인용한 궁중 카구라도 이들 어물관인들이 전승한 ‘천어가’ 곧 뱃노래의 하나일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지 않을까?

 

 

전라도 어부들이 멸치잡이 그물을 올리며 노래 말 중 ‘세노야, 세노야’라는 후렴이 나온다. 이 뱃노래는 시인 고은이 우리 토속 어부의 시 노래로, 다시 가수 양희은이 가슴을 저미는 절절한 가요로 불러 다시 태어났다.

 

세무야는 ‘센야’로도 읽히는데 이를 풀어 쓰면 ‘세노야’가 된다. 고은에 의하면 북 규슈의 어부들도 ‘세노야, 세노야’라는 뱃노래를 부르는 것을 들었다는 한다. 고은이 지은 ‘세노야’ 시를 두고 일본말이지 않나 논란이 있지만 이것은 오히려 그 옛날 전라도 도래인 어부들이 전한 뱃노래가 그대로 이어진 것이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참고문헌

上田正昭, <日本の神話を考える>, 小学舘, 1991

--. “宮內省の鎭坐神,” “韓神の実相,” “御神楽 「韓神」, <神道と東アジアの世界: 日本の文化とは何か>, 德馬書店, 1996

<古事記>, 校注 倉野憲司, 岩波書店, 1991

 

글쓴이=김정기 한국외대 명예교수 jkkim63@hotmail.com

 

김정기 교수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행정학석사, 미국 컬럼비아대학 정치학과 대학원에서 일본 근대정치사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언론학회 회장, 방송위원회 위원장, 한국정치커뮤니케이션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언론정보학부 명예교수.

 

저서로 『국회프락치사건의 재발견』(I·II), 『전후 일본정치와 매스미디어』, 『전환기의 방송정책』, 『미의 나라 조선:야나기, 아사카와 형제, 헨더슨의 도자 이야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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