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신화의 찬탈적 침략성2 상(上) 일제 조선침략 옹호 이데올로기 작용
<기기> 신화에는 천황의 ‘섭정’ 진구코-고-(神功皇后, 이하 ‘신공황후’)가 등장한다. 이 여인은 ‘삼한정벌’ 또는 ‘신라정토’의 영웅으로 상투적인 이미지가 굳어져 있다. 이 이미지는 메이지 시대 이래 근대 천황 상에 내포된 찬탈적 침략성을 상징한다.
필자는 신공황후의 이미지는 애초부터 조선을 표적으로 겨냥한, 저 땅의 지배자들의 마음속에 박혀 그것이 집단무의식으로 표출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지금도 그것이 일본 사회의 저류로 흐르고 있다고. <일본서기>에 나오는 신공황후의 삼한정벌 신화는 메이지 시대(1868~1912)에 정한론(征韓論)이 타오르게 한, 불쏘시개 구실을 하는가 하면 일제의 조선침략을 옹호하는 이데올로기로서 작용한 빌미가 되었다.
이 신화를 따라가 보자. 제14대 천황으로 되어있는 추아이(仲哀)의 제3비가 된 신공황후가 어느날 신탁(神託)을 받는다.
“처녀의 눈썹같이 생긴 나라가 바다머리에 있는데 그곳은 눈부신 금, 은, 화려한 색의 재물이 가득한 나라입니다. 이를 ‘다쿠후스마시라기노쿠니’((栲衾新羅国=신라국)이라합니다. 만일 내게 제사를 잘 지내면 칼날에 피를 묻히지 않고 그 나라는 반드시 복종할 것입니다.”(<일본서기>(2) 권 8, 130).
그런데도 추아이 천황이 이를 믿지 않고 규슈 남부의 쿠마소(熊襲)를 치다가 죽는다. 이는 신탁을 따르지 않는 벌이라고 되어 있지만 신공이 남편을 ‘밀살(密殺)’했다고 일본 역사작가들은 수군거린다. 그 뒤 신공은 출산이 임박한 몸으로 신라정벌을 끝내고 ‘태중 천황’ 오진(応神)을 낳았다고 한다.
■ 신라의 정토:일본인 마음속에서 버리지 못하는 삼한정벌 설
<일본서기>가 전하는 신공의 신라정벌은 다음과 같이 계속된다.
“때에 풍신이 바람을 일으키고, 해신이 파도를 일으켜, 바다 속의 큰 고기들이 다 떠올라 배를 도왔다... 노를 쓸 필요 없이 신라에 이르렀다.” “신라의 왕은 벌벌 떨며 어쩔 줄을 몰랐다. 일찍이 바닷물이 저절로 올라오는 일은 없었다. 천운이 다하여 나라가 바다가 되는 것은 아닌가... 내가 들으니 동방에 일본이라는 신국이 있어 천황이 다스린다는데, 그 나라의 신병(神兵)들이 쳐들어온 것이다.”
신라의 왕은 백기를 들고 스스로 목에 줄을 묶어 투항한 후 신라의 지적도와 호적을 제출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앞으로 영원히 복종할 것이며 나는 ‘천황의 마부’[養馬의 일]가 될 것입니다. 수시로 조공사를 보내겠습니다. 해가 서쪽에서 뜨고 강이 거꾸로 흐르는 일이 있어도 이 맹세는 변함이 없습니다.”
고구려, 백제의 왕들도 그 소식을 듣고 모두 항복하면서 머리를 땅에 대고 “이후는 길이 ‘서번(西蕃 「니시노도나리」)이라 일컫고 조공을 그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임신 중인 신공은 돌로 배를 눌러 출산일을 늦추었고, 보물을 가득 싣고 돌아와 규슈에서 오진(応神) 천황을 낳았다고 한다. 신공은 신라에서 귀국하기 전 삼한(三韓 「미쓰노가라구니」) 땅에 우치츠미야케(內官家: 천황 직할령)를 두었다고 한다. 이것이 일본의 고대 사가들이 아직도 집착하는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를 두어 남선 경영을 했다는 설의 근거다.
이것이 일본인 마음속에서 버리지 못하는 삼한정벌 설화다. 일찍이 720년대 경 신라와의 관계가 악화하자 당시 지배자들은 ‘신라무례’롤 빙자하여 신라토벌에 나서자는 목소리를 높였는데, 이때 부각된 것이 삼한정벌 설화이며, 그것을 배경으로 ‘카라국(韓國)’을 ‘번국(蕃國)’ 사관이 <일본서기>의 근거가 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것은 이미 8세기부터 ‘정한론’이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다. 그렇게 보면 메이지 시대에 이르러 이른바 ‘정한론(征韓論)’의 유령이 출몰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정한론이 불붙는 가운데 신공황후는 1878년 메이지 왕정의 지폐의 초상으로 등장하게 된다. 결국 이는 황국사관으로 포장되어 일제에 의한 조선병탄으로 치닫게 된다.
이렇게 보면 신공황후에게는 다른 이미지가 들어갈 여지가 없는 듯 보인다. 그러나 신공황후의 이미지는 복잡한 요소들이 다원적으로 얽혀 있다. 이 복잡한 요소를 풀기 위해서는 <기기>의 신공황후 기, 옛 풍토기, 신공을 배출한 오키나가(息長) 씨족, 신라왕자 아메노히보코 전승, 그리고 신공에 관한 지역 전승 분포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 김석형 "신공황후의 신라정벌 신화는 날조"
물론 <기기>가 전하는 신공황후의 신라정벌 신화가 날조되었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특히 720년 나왔다는 <일본서기>의 경우 신공황후 신라정벌을 대서특필하고 있는데,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 설은 황국사관의 근거가 되고 있다. 이 문제의 ‘임나’를 일본어로 ‘미마나’라 부르면서 일본의 역사학계에서는 4~5세기 남부 조선을 ‘경영’했다는 설이 지배적이었었다. 전후가 되면 이 설은 ‘지배적’인 자리는 내어 주었지만 그 저류는 도도히 흐르고 있다.
문제는 신공황후가 개선해 귀국하기 앞서 가라 땅에 ‘우치츠미야케’를 두었다는 설을 일본의 역사학자들이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북학 사화과학원의 ‘원사’인 김석형 교수는 이른바 ‘미야케’에 대해 ‘헛소리’라며 다음과 같이 짚는다.
총괄적으로 말하여 미마나 미야께를 우리 가락국에 설치하였다고 들고 나오는 일본 학자들이 그 설치 시기를 3세기로 잡건 4세기로 잡건 헛소리라는 것도 이미 명백할 것이다. 그러나 이 맹랑한 《학설》은 오늘도 일본 학계에서는 활개를 치고 있다. 더욱이 그 남부 조선 《경영》의 마지막 시기에 야마도가 고령에 발판을 두고 있었다는 주장에 이르러서는 자기의 량심을 저바리고 남까지 속여가면서 이웃 나라 력사를 두고 모욕하는 자들의 정체를 로골적으로 드러 내여 놓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김석형, 1966, 348).
김교수가 말하는 것은 아스카(飛鳥) 시대[6~7세기]에 이르러서야 중앙정치세력으로 야마도 왕정이 성립되었는데, 3세기 이상 선행하는 시기에 야마도 왕정이 바다를 건너 가락국에 미마나 미야케를 설치했다는 일본 역사계의 억지를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본래 야마도 왕정이 ‘인민들에 대한 착취의 흡반’인 미야케를 기비 지방이나 북 규슈에 설치한 것은 6세가 전반쯤이다. 일본 역사계는 <일본서기>의 신공황후가 가락국에 설치했다는 미야케와 야마도 왕정이 열도안에 설치한 미야케를 구분하여 전자는 ‘관가(官家)’로, 후자는 ‘둔창(屯倉)으로 표기한다. 또 미야케와 관련된 성씨를 표기할 때는 ’삼댁(三宅)‘으로 표기한다.
이에 대해 김석형 교수는 이렇게 일갈한다.
《다라시》라는 말 토막이 들어 있는 《천황》의 이름이 7세기 이르도록 열 개도 넘는데 한자로 표기에는 《足》으로도 《帶》로도 되어 있어 그 간에 아무 차이도 없다. 《足》, 《帶》가 서로 다를 것이 없는 《다라시》인 것 처럼 《관가》나 《둔창》이 서로 다를 것이 없는 같은 《미야께》이며 《관가=미야께》를 조선의 《미마나》에 다가만 붙인 것은 후세 력사가 위조자들의 소행일 따름일 것이다(김석형, 1966, 42).
참고문헌
김석형, <초기조일관계연구>, 사회 과학원 출판사, 1966
<일본서기> 시리즈 (二), 坂本太郎·家永三朗·井上光貞·大野晋 校注, 岩波書店, 1994
글쓴이=김정기 한국외대 명예교수 jkkim63@hotmail.com
김정기 교수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행정학석사, 미국 컬럼비아대학 정치학과 대학원에서 일본 근대정치사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언론학회 회장, 방송위원회 위원장, 한국정치커뮤니케이션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한국외대 사회과학대학 미디어커뮤니이션 학부 명예교수다.
저서로 『국회프락치사건의 재발견』(I·II), 『전후 일본정치와 매스미디어』, 『전환기의 방송정책』, 『미의 나라 조선:야나기, 아사카와 형제, 헨더슨의 도자 이야기』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