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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EAN 칼럼 13] 같은 공동체? EU와 다른 ‘아세안 정체성’은 뭘까

2020년은 아세안 정체성의 해...“아세안이란 팀을 이해한다”는 것이 정답

 

1967년 8월 8일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필리핀-싱가포르-태국 등 5개국 외교부 장관이 ‘아세안 창립선언’(일명 방콕선언)을 채택하면서 세상에 태어났다.

 

아세안(Association of South East Asian Nations)은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연합’이다. 이후 부르나이(1984), 베트남(1995), 라오스-미얀마(1997), 캄보디아(1999)이 가입해 현재 10개국이 되었다.

 

태국을 제외하고 모두 힘없는 신생독립국들의 모임에 불과했던 이 조직은 2020년 현재 유럽연합(EU)과 함께 대표적인 지역기구로 발전했다.

 

■ 동남아와 아세안의 차이점: 지리적 개념 vs 일종의 ‘팀(Team)’

 

아세안(ASEAN)이 대내외적으로 많이 알려졌으나, 언론 그리고 학계에서는 아세안과 동남아를 혼용하는 경우가 여전히 잦다.

 

지리적인 개념의 ‘동남아’는 영어로 Southeast Asia인데, 문자 그대로 보면 ‘동남쪽에 있는 아시아’를 의미한다. 이 개념은 동남아인들이 스스로 발전시킨 개념이 아닌 이 지역을 지배하러 온 서구 열강들이 만들었다. 유럽인들이 보기에 동남쪽에 있는 곳에 무수한 섬들과 대륙이 있기 때문에 이 지역을 ‘동남아’로 칭한 것이다.

 

반면 ‘아세안’이란 개념은 국가들이 모여 제도화를 이루기 위해 모인 일종의 모임으로 볼 수 있다. 지리적으로 아시아의 동남쪽에 모인 국가들이 지역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다양한 현안들을 논의하고 때로는 지역 차원의 선언 또는 성명을 발표하며 끊임없이 존재를 알리는 일종의‘팀(Team)’이다.

 

역사학자인 왕궁우(Wang Gungwu) 싱가포르 국립대학교(National University of Singapore) 교수는 동남아를 굳이 나누자면 해양 국가와 대륙 국가로 분류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브루나이, 필리핀은 해양국가로 구분되며 이 5개국은 역사적으로 상업과 무역을 중시하였다. 정치시스템 또한 브루나이와 말레이시아를 제외하고는 모두 공화국 체제다.

 

 

반대로 중국 대륙과 인접한 베트남을 포함한 태국, 라오스, 캄보디아, 미얀마는 대륙 아세안으로 구분되며, 전통적으로 농업을 중시하였고 왕정 체제 기반으로 국가의 기반을 닦았다고 볼 수 있다.

 

해양국가와 대륙국가의 언어 역시 다르다. 해양 국가들은 오스토로네시안(Austoronesian)에서 파생된 언어를 모국어로 쓴다. 이 언어는 시제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반면, 대륙 국가들은 오스트로아시아(Austro-Asiatic) 언어에서 파생된 크메르어-몬스(Mons) 언어를 주로 사용하는데, 성조(tone)가 없고, 모음체계가 매우 다양하다는 특징이 있다.

 

언어학 관점에서 보면, 해양국가들은 말소리보다 의미전달(context)에 주력한 언어체계가 발달되었다. 대륙 국가들은 의미 전달보다는 말소리, 즉 다양한 구개음이 발달된 언어를 쓰고 있다는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 인도네시아가 생각하는 아세안 정체성

 

‘이렇게 다른 국가들이 과연 아세안이라는 팀 구호 아래 하나의 정체성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라는 회의적 시각이 여전히 지배적인 분위기 속에서 2018년 아세안의 큰 형님 인도네시아가 조직의 오래된 숙원사업인 ‘아세안 정체성’에 대한 연구, 그리고 내러티브(narrative, 이야기)를 만들어가자고 제안했다.

 

인도네시아 교육문화부(2018~2019년 문화예술분야 의장국)가 2018년 10월 족자카르타에서 개최한 ‘아세안 문화예술장관회의(ASEAN Ministers’ Meeting Responsible for Culture and Arts)’에서 관련 논의가 본격화되었다.

 

 

당시 인도네시아는 아세안 정체성을 정립해 나가기 위해서는 역사, 문화, 관습, 철학적 관점에서 접근해야 하며, 더 나아가 아세안의 미래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2018년 회의에서는 ‘아세안 정체성에 대한 논의를 시작할 때라는 합의점’을 도출하였고, 2019년 회의에서 ‘아세안 정체성 강화를 위한 예방문화 포용에 관한 족자카르타 선언(Yogyakarta Declaration on Embracing the Culture of Prevention to Enrich ASEAN Identity)’을 채택했다. 2020년을 아세안 정체성의 해(Year of ASEAN Identity)”로 지정하는 성과도 거두었다.

 

족자카르타 선언은 아세안 정체성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예방문화(culture of prevention)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며, 조화로운 사회, 온건주의(moderation)의 가치를 역내에 확산시킬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아마도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최대의 목표로 삼고 노력하는 아세안이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폭력과 갈등을 유발하는 모든 행위를 자제하고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는 ‘예방’이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에 이런 선언을 채택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한편, 레트노 마르수디 인도네시아 외교장관은 특정 인종 또는 종교가 지역 전체를 지배하지 않는 조화로움 그리고 다양성이 곧 아세안의 정체성의 근간임을 강조한 바 있다.

 

■ 그렇다면 자주 비교되는 EU도 정체성의 위기?

 

아세안과 자주 비교되는 유럽연합(EU) 역시 정확한 EU 정체성이 있다고 보기에는 어렵고, 오히려 최근에는 정체성의 위기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이다.

 

EU의 경우, 아세안보다 훨씬 많은 27개(브렉시트 이전에는 28개국) 회원국으로 구성되지만 아세안에 비해 국가 간 공통점을 더 쉽게 찾을 수 있다. 2004년 회원국 확장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EU는 완벽한 서유럽국가 모임이었으며, 모두 민주주의와 기독교 중심 국가들이었다.

 

서유럽 국가들이 모국어로 쓰는 언어 종류 역시 로망스어와 게르만어로 나뉘어지긴 하나 이 두 언어의 뿌리는 인도-유럽 언어이다. 그만큼 인종, 정치체제, 종교, 언어적으로 공통점이 많다는 소리다.

 

2004년부터 과거 소련이었던 동유럽 국가들이 하나둘씩 가입하면서 슬라브 문화와 러시아 정교 문화도 일부 EU에 편입되었다고 볼 수 있지만, 여전히 EU는 서유럽이 주도하며 ‘인간의 존엄성, 자유 민주주의, 평등, 법치주의, 인권존중’이라는 기조 아래 모인 초국가적인(supranational) 지역조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잘 돌아가는 단체처럼 보이는 EU도 속으로는 다양한 골머리를 앓고 있다. 2008~2009년 그리스가 사실상 파산을 신청하는 등 다수 유로존 국가들이 아직까지 대규모 채무 부담을 안고 있으며, 독일 지분이 가장 많은 유럽중앙은행(ECB)이 그리스와 여타 재무불건전 국가들(이탈리아, 포르투칼, 스페인 등 일명 PIGS)에 긴축재정을 요구하면서 국가·국민들 간 불만이 크다.

 

그리고, EU의 주요 의사결정은 아세안과 달리 국가별 지분이 있으며 독일과 프랑스가 주도한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특히 영국은 유로화 채택, EU 헌법 제정 등에 불만이 심했고, 이를 ‘비민주적’이라고 규정하며 EU를 오랫동안 비난했다. 결국 영국은 2016년 6월 국민투표를 통해 ‘EU탈퇴’라는 다소 충격적인 결과를 내놓았다.

 

그도 그럴 것이 영국은 1960년 유럽경제공동체(EEC) 가입을 시도했을 때, 당시 영국의 전통적 앙숙인 프랑스가 2번이나 영국의 가입을 거부(veto)하면서, 대영제국의 자존심이 크게 상했고, 1973년 유럽공동체(EC)에 가입하면서도 유럽에 대해서는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았다. EU는 2012년 노벨평화상 수상이 무색할 만큼 현재는 영국뿐만 아니라 프랑스, 헝가리, 덴마크 등 EU 회의론 국가들(eurosceptics) 사이에서 EU에 대해 회의적인 여론이 커지고 있고, 더러는 EU의 정체성 위기라는 소리도 있다.

 

■ 아세안 정체성 탐구를 위한 길, 그리고 한국은 어떤 기여할까

 

아세안 정상들과 외교장관들은 “EU를 아세안의 모델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공공연하게 말한다. “EU처럼 단일화폐나 단일 법인격체의 적용 계획이 없다”고 하며, 아세안은 서로의 다양성을 최대한 존중하는 최소공약수와 같은 지역조직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아세안은 EU와 다르게 한국을 포함한 10개 완전 대화상대국(미국, 중국, 일본, 인도,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러시아, EU)과, 부분 대화상대국(파키스탄, 노르웨이, 스위스, 터키), 개발파트너국(독일, 칠레)과의 긴밀한 협력을 통해 역내외 포용성을 추구하며, 아세안이라는 집에 많은 손님들이 놀러 올 수 있게 문을 열어두고 있다.

 

물론 아세안의 느슨한 통합방식 그리고 정체성 개념화 과정이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아세안은 특유의 친근감과 다정함을 기반으로 결과중심적인 방식보다 과정에 초점을 맞춰 아세안 10개국이 모두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지역통합을 추구하고 있다. 이런 과정 속에서 아세안은 ‘아세안 정체성’에 대해서 끊임없이 탐구하고 새로운 개념을 정립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아세안사무국은 지역의 석학들을 초청하여 ‘아세안 정체성’을 논의하는 심포지엄을 2021년에 개최할 예정이다. 이 심포지움은 한-아세안 협력기금이 지원하는 사업이며, 한국은 아세안 정체성 이니셔티브를 지원하는 유일한 대화상대국이다.

 

 

아세안의 정체성을 이해한다는 것은 이 지역의 철학과 역사를 포함하여 해양·대륙 동남아 10개국이 모인 아세안이란 팀을 이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게임을 시작할 때 상대팀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전략인 것처럼, 우리가 ‘아세안 정체성’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아세안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외교력 발휘는 물론 우리 기업들이 아세안에 진출할 때도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본다.

 

양선영 주아세안대표부 전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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