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국적인(transnational) 삶은 국가와 국가에 걸쳐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채수홍 서울대 인류학과 교수가 한국과 베트남 ‘사이에 낀’ 채 초국적 삶을 살아가는 베트남 한인에 관한 연구서 ‘한인의 베트남 정착과 초국적 삶의 정치’를 출간했다.
서울대 관악캠퍼스 연구실에서 만난 그는 “이 책은 한국인이지만 베트남에 거주하며 두 나라에 걸쳐 사는 초국적 가족, 일터를 갖는 이들을 주목했다. 2001년 초부터 자료를 모았으니 50명을 인터뷰를 했지만 훨씬 많다. 실제로 몇 1000명일 것이다”고 말했다.
베트남이 개방하고 한국과 재수교를 한 1992년이다. 이후 30년이 흘렀다. '잠시 방문이 아닌 10년부터 20년에서 30년에 이르는 현지에 거주하는' 베트남 한인들이 얼추 20여만 명이다.
그는 “베트남 ‘개방’과 재수교 이후 20여만 명이 넘어서는 한인 성격도 달라졌다. 물론 베트남과 베트남인과의 관계도 변화가 생겼다. 갈등이 아닌 공존의 해법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 책이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가 만났던 책 주인공은 대부분이 유명인이 아닌 익명의 인터뷰이(interviewee, 면접받는 사람)들이다. 세월이 변하면서 한인의 성격과 베트남인들과의 관계도 크게 달라졌다. 달라지지 않은 것은 그들이 현재 베트남에서 한인의 삶을 살면서 한국인의 ‘초국적인’ 초상이라는 것이었다.
■ “30년동안 한인 성격도, 베트남과 베트남인과의 관계도 달라졌다”
채수홍 교수는 책 ‘한인의 베트남 정착과 초국적 삶의 정치’를 통해 특히 베트남 개혁개방 초기와 달라진 ‘한인의 삶이 달라진 점을 주목했다.
집필하기 시작해 3년만에 탈고하고 출판하면서 '베트남 한인'(현지에 체류하는 한국인을 통칭)의 삶의 변화를 새삼 실감했다.
이제 베트남 경제의 기회도 많아졌고, 한인 숫자도 많아졌다. 과거에는 한인이 적어 동질성이 강했지만 이제는 너무 많아지다보니 이질적이고 거리감이 생기고 갈등을 빚기도 한다. 가령 호치민 한인사회가 먼저 분화되었고, 이어 하노이도 분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한인(회)의 시기별 정착 과정도 달라졌다. 초기 노동집약적인 기업만 받아들일 때가 있다. 이후 IMF 시기를 거치며 일자리를 없는 이들이 베트남으로 갔다. 이후 한국 대표 기업 삼성 진출과 제조-금융-유통-건설 등으로 다양한 업종이 진출했다. 그 사이 베트남도 크게 변화했고, 한인들의 성격도 크게 변화가 생겼다”고 말했다.
더불어 한인들의 베트남과 베트남인과의 관계도 변화가 생겼다. 그동안 경제적 부와 상대적으로 권력을 누리다보니 한인이 ‘우위’에 있다는 착각을 해왔다. 직장, 기사, 가정부 등 명령하는 등 고용 우위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초기 베트남들은 대부분 가난했다. 하지만 이제 베트남인들도 한국인보다 돈을 많은 이들이 등장했고, 남다른 수완으로 번창하는 이들이 나오면서 점점 관계가 달라지고 변화되고 있다.
책에는 이런 대목이 눈에 밟힌다. "한국기업과 한인은 베트남 경제에 공헌하고 있는 조력자로 인식될 수도 있지만, 동시에 베트남의 노동 문제와 환경 문제를 일으키는 주체, 대외 의존을 심화시키는 외국자본, 민족감정을 자극하는 외국인으로 간주될 수 있는 잠재력도 지니고 있다."
채 교수는 “이 책을 통해 이런 점을 비판하면 섭섭할 수도 있지만 한인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오래 산 한인들은 베트남을 이해를 잘 한다. 잘 지내고 있다. 하지만 베트남을 안다는 것은 진출한 한인회의 역사뿐만이 아닌 베트남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이 책이 생활에서나 사업에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 국가와 국가에 걸쳐 있는 베트남 한인의 ’초국적인 삶‘은?
그렇다면 책 제목에도 들어가 있는 ’초국적인, 트렌스내셔널‘은 무슨 뜻일까.
채 교수는 “초국적인 말은 국가와 국가에 걸쳐 있는 뜻이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한 곳에 정박해 살았다. 지금은 글로벌제이션(Globalization), 즉 세계화, 전지구화가 되면서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이주한다. 자본이 이주하면서 사람(노동)들도 이주한다. 잠깐 방문하는 것이 아니라 예를 들어 베트남 한인들도 10년 이상, 어떤 이는 20년에서 30년까지 살아오고 있다”고 설명했다.
베트남이 개방된 것은 1985년이다. 1992년 한국과 국가간 재 수교가 되었으니 벌써 30년이 되었다.
“개방시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이들도 있다. 이들은 한국인이지만 인생의 반을 베트남에서 살고 있는 셈이다. 이들은 사실 두 나라에서 걸쳐서 산다. 가족들도 ‘초국적 가족’이다. 흩어져 살고, 일터도 여러 나라로 걸쳐 초국적으로 형성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베트남 이주노동자들도 한국에서 그렇게 살아간다.”
가령 한 베트남 이주노동자가 10대 중반에 한국에 와서 10년 이상 한국에 살았다면, 3분의 2는 베트남 사람이지만 3분의 1은 한국에 사는 사람으로 봐야 한다. 비록 베트남 문화, 사회적 관계를 맺고 문화를 생활을 하지만 ‘걸쳐있다’는 것이다.
물론 베트남에 오랫동안 거주한 베트남 한인은 이제 베트남이 더 익숙하다. 귀국해도 한국에서 일자리가 딱 준비되는 것도 아니어서 베트남에 사는 것이 편하다. 그렇다면 “한국인이 지속적으로 베트남에 살려면 베트남에 대해 남의 나라에 이익을 주는 나라라고 내면화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 익명의 50명 인터뷰, 실은 1000여명...한인 삶의 궤적이지 유명인 인터뷰가 아니다
채 교수는 인류학자다. 인류학에서는 문화인류학이 압도적이다. 남의 문화를 이해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베트남 한인사도 김우중-박연차 등 굵직한 발자취를 남긴 유명인의 역사도 있지만 그가 주목하는 것은 익명의 한인들의 삶이다. 익명의 인터뷰지만 그는 “실은 1000여명의 만남이 녹아들어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한인 삶의 궤적은 개인 위인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다. 인류학과의 연구는 익명이 필요하다. 이름을 쓰는 것은 허락을 받아야 한다. 그 사람의 논지가 중요하다. 또한 실명으로 노출될 경우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 ‘윤리적인 문제’로 익명처리한다. 도와주려고 했는데 피해가 되면 안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채 교수가 책의 한 페이지에 사진들을 채우고 실명을 쓴 원로 차상덕옹은 열외다. 현재 베트남 한인 중 최소 80세 이상인 원로세대는 최대 100명 미만이다.
그는 “차상덕옹은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다가 건설사를 운영하다가 한국에 돌아왔다가 다시 중동을 거쳐 베트남으로 돌아가 사업을 했다. 사업으로 한국 정부의 훈장을 받았지만 삶의 궤적은 ‘초국적인 삶’이었다”고 소개했다.
인류학자는 항상 문화와 문화가 부딪칠 때 발생하는 현상이 관심사항이다. 문화적인 차이가 가져온 결과를 관찰한다. 그는 ‘공장이 없는’ 노동자들이 개혁개방으로 인해 ‘산업노동’으로 변화되는 시기의 베트남 문화적 변화에 주목을 한 바 있다. 도시 연구도 거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전 농촌노동과 확연하게 달라진 시간의 개념과 월급 방식, 소비 시장, 휴대폰과 오토바이와 함께 사는 모습 변화 등을 분석하면서 가설이 제대로 맞는지를 연구하는 것이 그의 삶의 과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여전히 학술적인 느낌'이 있지만 한인과 한국이 베트남을 이해하기 위한 대중서에 가깝다”고 역설했다. 그리고 그는 앞으로 ‘차라리’ 에세이를 쓰고 싶다.
한국기업의 베트남 진출이 날로 증가함에 따라 베트남 한인은 양적으로 빠르게 팽창하고 질적으로도 분화될 수밖에 없다. 해외 공관원이나 대기업 상사 직원 등의 주재원, 중소기업의 공장 매니저, 자영업자, 취업 대기자와 실업자, 은퇴자 등이 정치경제적 조건과 사회문화적 실천 행위에 따라 차별화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안타깝게 생각하는 지점은 편견과 틀린 주장들이다. 그는 "어떤 한인들은 민족 정체성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자신도 모르게 베트남인을 타자화시키는 문화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일상생활에서 문제가 되는 원인으로 베트남인의 문화적 관념과 행동양식 탓으로 돌리는 행태를 부지불식간에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공장-현장에서 문제가 생기면 베트남인이 “청결하지 못하고”, “거짓말을 잘하고”, “책임감이 없다”라고 비난하고, 마찬가지로 베트남 근로자도 불만이 증폭되면 한인 매니저가 “급하고”, “폭력적이고”, “의심이 많다”라고 하며 부정적 ‘민족성’으로 해석하곤 하는 것이다.
베트남에 대한 이런 편견과 틀린 주장에 대해 문학과 은유가 들어가더라도 쉽게 대중에게 전달하는 것이 학자로서 베트남을 알고 싶은 한인과 독자들에게 보답하는 길이는 것이라고 했다.
■ “베트남은 한국에게 감사의 땅...한인들이 베트남을 도와준다는 말은 착각일 수도”
한국은 베트남의 제2 수입국이자 제3 수출국으로 확고하게 자리매김하고 있다. 570억 달러(약 67조 8,300억 원)에 이르는 투자와 7000개가 넘는 기업이 진출해 있는 베트남과 한국은 이제 떼려야 뗄 수 없는 경제 협력국인 것이다
채 교수는 “한국과 베트남의 경제교역량은 수년 내 중국 다음으로 커질 것이라고 예상된다. 더 중요한 것은 어마어마한 흑자를 낸다는 것이다. 많을 때는 400억 달러(약 47조 6000억 원)에 육박하기도 했다. 반면 한국은 일본 상대로 많은 적자를 내고 있다. 베트남은 우리 산업을 옮겨가게 하고, 새 일자리를 주었다. 그런 의미에서 베트남은 한국에게 '감사의 땅'이다. '한인들이 도와준다'는 말은 착각일 수도 있다”고 관점을 재조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한베가정들도 농촌 총각-도시 과년 여성 등의 관계 도식도 달라지고 있다. 한국 남성과 베트남 고학력 명문 집안 여성 가정도 늘었다. 한인학교 등을 통해 3000여쌍이 등장하는 한베가정이 앞으로 한인사회 중심이 될 것이라고 주목했다.
■ 베트남과의 1994년 첫 인연, 현지에 2년 거주-매년 방학 때 한 달살기
채 교수가 베트남 한인을 처음 만난 것은 1994년이었다. 이후 1998년부터 2000년까지 박사논문 집필을 위해 호치민 현지에 살면서 많은 한인을 만났다. 조사하는 사람으로 허가를 받아 공장의 일도 직접 했다.
베트남 한인의 삶이 삶에서 흥미로운 탐색으로 다가온 것이 미국 유학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대학교에 자리를 잡고나서다. 매년 여름방학, 겨울방학 때 한 달씩 정도 가 있었다. 2011년과 2019년에 안식년(연구년)에 1년씩 생활하면서 현지 연구를 했다.
인류학 전공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지역 전공이고, 다른 것은 연구 전공이다. 그는 베트남 지역과 도시가 전공이다. 특히 산업지대의 노동자의 문화, 외국에서 온 기업들과 경영진들과 어떻게 때로 화합하고, 때론 갈등하는가 점에 관심을 가졌다.
그 정도면 "베트남을 뼛속까지 알겠다"는 질문에 그는 “베트남에 대해 우리가 아는 조사를 하면 알아지는 것이 아니라 뭘 모르는지를 알게 된다. 어쩌면 처음 간 사람이 가장 잘 안다”고 웃었다.
그는 책에서 “베트남인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베트남 한인 사회 내부에서도 구성원이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상대를 존중하는 것이 상생의 출발점”이라고 썼다.
그렇다. 베트남인과 20만 정착 한인, 한인과 한인 등에 대한 공존의 해법은 너무나 쉽다. 다름을 인정하고 상대를 존중하는 것이 그의 갈등이 아닌 공존의 해법이었다.
채수홍 교수는?
미국 CUNY(the City University of New York, Graduate School and University Center)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서울대학교 인류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1994년부터 베트남의 도시, 산업, 노동의 문화를 연구하고 있다. Wounded Cities, Labor in Vietnam, 『맨발의 학자들』 등의 공저를 출간했다. 또한 “The Political Processes of the Distinctive Multinational Factory Regime and Recent Strikes in Vietnam”, “호치민 시개혁과정에 대한 정치경제학적 연구”, “한인 공장매니저의 초국적인 삶” 등의 논문을 집필했다.